도마 이야기/선교 강의

기독교 세계선교사_케인

임도마 2022. 10. 13. 10:50

기독교 세계선교사_케인

선교행정연구소/선교 자료 2011-05-21 15:06:26


기독교 세계 선교사

- J. Herbert Kane 저, 박광철 역

1. 개신교 유럽 선교의 기원  A.D. 1600 - 1800

  일반적인 기대는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영적세력이 1500년경에 시작된 세계 탐험과 식민지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카토릭과는 다르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면 개신교 교회가  선교 프로그램을 착수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 ?

   첫째이며 가장 유력한 요소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이다. 그들은 예수의 지상명령(至上命令 : the Great Commission)이 원 사도들에게만 해당한다고 가르치고, 당시에 복음은 세상 끝까지 완전히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혹 그 후대(後代)가 복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며 그 불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며, 또한 즉각적인 소명과 함께 되어진 사도직과 특수한 기능 및 기적적인 능력은 이미 끝났고 후세에 나오는 교회는 선교사를 땅끝까지 보낼 권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책임도 없다고 가르쳤다.  하드리안 사라비아와 져스티니안 폰 벨츠는 교회가 세계 복음화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무시당하고 멸시당했다. 한편 이상하게도 세계복음화를 가장 열렬히 부르짖은 사람은 에라스무스였다. 당시 세계선교에 이같은 부정적인 관점이 정통 루터교 입장이었다.(예 1651년 발간된 위텐버그 신학 교수단의 공식문서)  더욱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인간의 책임을 배제한 예정론자들이 많았다.

   두번째 요소는 16,7세기의 개신교 교회의 서글픈 어려움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개신교는 카토릭에 비해 세력과 숫자에 대단히 열세였다. 또한 카토릭이 반종교개혁으로 많은 영역을 되찾은데 반해 30년전쟁으로 타격을 받고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서 생존의 문제에 고민해야 했던 개신교 교회는 세계복음화에 필요한 비젼이나 열정같은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더불어 루터교와 개혁파교회의 살상전쟁은 세력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세번째 요소는 개신교의 유럽이 아시아, 아프리카 및 신세계의 선교에서 고립된 것이다. 카토릭 국가인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이 거의 한 세기 이상 바다를 석권하고 세계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그들의 국왕이 해외식민지의 기독교화에 깊은 관심을 갖은 반면 뒤 늦게 출발한 화란과 영국의 동인도회사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네번째 요소는 로마 카토릭교회가 세계에 확대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였던 종교적인 질서가 개신교 교회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가장 컸던 모라비안 교도들조차도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에 비해 열정을 빼고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대륙에서 시작

근대적인 선교 사업이 유럽에서 시작되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실패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1555년 칼빈이 4명의 성직자와 프랑스 위그노 일단을 리오 데 자네이로 만에 보내 박해받는 개신교도들을 위해 영지를 개척한 일이다. 1622년 화란 동인도회사의 독려로 성직자와 선교사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레이든에 있는 대학에 신학교를 설립한 일, 1661년 동지회의 창설자인 죠지 폭스가 3명의 동료를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한 일, 최초의 루터교 선교사로 1664년경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외친 오스트리아인 저스티니안 폰 벨츠 남작이 기아나로 항해한 일 등  다른 선교 시도도 줄줄이 실패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선교의 노력을 지속하기 전에 교회는 내적으로 새로워져야 했던 것이다.

 

독일의 경건주의(Pietism in Germany)

개신교 유럽의 국교회의 황량한 정통주의와 죽어버린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인 경언주의 운동은 근대적 선교 사업의 발단이라고 본다.

경건주의의 시조는 루터교 목사인 필립 스페너인데  그는 체계적인 영적 생활의 계발을 통해 자기 교회 회중의 힘없는 영적 음율을 고조시키려고 했다. 경건주의 신학은 전도의 열정이 없는 한 설교의 비젼이 있을 수 없고, 개인적 경건 생활이 없는 한 전도의 열정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의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 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성직자들의 분노를 야기 시켰다. 삭소니의 대학들의 문호 폐쇄로 1694년 할레에 그들 자신의 대학을 설립하였다. 1705년 스페너의 사망이후 어거스트 프랑케는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할레가 경건주의의 교육센터가 되었고 18세기 선교 사업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덴마크 할레 선교회(The Danish-Halle Mission) 

할레 대학에서 형성된 첫번째의 개신교 선교 기구가 덴마크 할레 선교회이다. 코펜하겐의 궁정목사인 프랜즈 루트켄즈박사가 1705년, 프레드릭 4세의 명에 따라 동인도에서 일할 선교사를 모으게 되었는데 덴마크 내에서 적임자를 발견할 수 없자 독일의 스페너와 프랑케를 만나 경건주의자들 가운데 천거를 받았는데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하인리히 플뤼챠우가 바로 그들이다. 인도에서 15년을 지냈던 지겐발크는 안식년인 1715년에 유럽각지를 여행하면서 트랑케발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는 덴마크와 영국의 국왕의 대접을 받았고 거기서 유력한 청년 진젠돌프를 만났는데 진젠돌프는 후에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아버지가 된 인물이다. 1719년 그가 사망할 때 선교부는 덴마크, 독일, 영국, 심지어 뉴잉글랜드에 많은 동지들을 갖게 되었다.

 

모라비안 선교회(Moravian Missions) 

1467년 연합형제단을 형성한 월도파와 모라비안의 존 후스 추종자들이 반종교개혁으로 거의 소멸되고 남은 사람들이 1722년 삭소니로 이주하여 진젠돌프 백작의 배려로 그의 영지에 정착하므로 흔히 헤른후트(Hernhut : The Lord's Watch)라고 알려진 이 지역은 세계를 돌며 선교 운동을 일으킨 그 근원과 센터가 되었다.  니콜라우스 진젠돌프는 스페너애 의해 복음을 들어 회심하였고 할레에서는 프랑케의 입문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혈통과 신앙고백에 있어 열정적 경건주의자였다. 얼마되지 않아 지도자로 인정받은 그는 1737년 모라비안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1730년 코펜하겐을 방문한 진젠돌프 백작은 선교사를 원하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리랜드 출신의 두 에스키모를 만나고 그들의 요청에 깊은 감동을 받아 헤른후트에 돌아오자 사람들 앞에 호소하였고 이를 계기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선교는 1732년 버진열도의 덴마크령 성 토마스섬의 흑인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1733년엔 그린랜드, 1734년엔 버진열도의 성 크르와섬, 1735년엔 수리남, 1737년엔 황금해안과 남아프리카, 1740년엔 북미 인디언, 1754년엔 쟈마이카, 1756년엔 안티구아 등 1732년부터 1760년사이에 226명의 모라비안선교사들이 외국에 들어갔다. 그들의 선교사역이 20년이내에 지난 2세기동안 영국 교회와 개신교가 수행한 것보다도 많은 선교 사업을 실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계복음화의 과제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책임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책임 수행이 공동체의 “공동적인 과제” 임을 절실히 의식하고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업이 공식적인 교육이나 신학적 배경을 거의 갖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경이로운 것이다. 거의 240년이 지나서도 모라비안교도들은 여전히 세계 각처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주요 근거지는 서독, 영국, 덴마크 및 미국이었다.

1797년에는 네델란드선교회가 발족하였고 19세기에 와서는 약 15개의 대륙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독일의 선교회들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현재 독일 계통의 선교회는 1,300여개에 달한다.

 

복음적 각성(The Evangelical Awakening) 

대륙의 선교 운동이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복음주의 각성에 대한 영국 선교 운동도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닌 한 사건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 복음주의 각성의 위대한 설교자 웨슬레가 개인적으로 진젠돌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난 것과 휘트필드가 프랑케의 글을 연구한 것이 두 측면 사이의 연결점이라 할 수 있다. 웨슬레는 회심을 체험한 직후부터 전도사역을 시작했는데 40년동안 하루 평균 3-4회의 설교를 감당했으며 그의 천재적인 조직력으로 인하여 위대한 감리교회가 형성되었으며 그가 도덕적.종교적으로 파멸되어 가던 영국을 건지고, 케리에 의해 출항된 근대적 선교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초기 영국 선교회(Early British Missions)   

1792년에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윌리암 케리와 더불어 시작한 선교를 영국 선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전에 이미 세 선교기관이 있었는데 원래 북미의 식민지 형태 내에서 운영하도록 의도된 기관들이었다.

첫번째는 1649년에 창설된 뉴 잉글랜드의 복음 선포회로 북미의 인디언들과 더불어 조직된 것으로 존 엘리오트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여 메사추세츠의 인디언들을 위해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반세기를 헌신하였다.

두번째는 기독교 이해 증진회(SPCK)로 1698년에 성공회와 함께 하나의 독립적인 선교회를 발족하였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토마스 브레이였는데 이 기관은 원래 신세계 백인 이주민들의 종교생활을 돕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그러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선교기관이 되었다.

세번째는 해외 복음 선포회로 세계적으로 SPG로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기관으로 영국교회의 초기 선교 100년 동안 거의 유일한 선교회였다. 자매선교회로는 교회 선교회가 있었다. SPG는 역시 토마스 브레이가 발족에 역할을 감당했으며 1701년 두 가지 목적으로 왕실의 허락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목적은 첫째 종교 교육의 결여로 이단 종교에 흡수될 위험이 있는 해외의 영국 거류민의 영적인 문제를 돕기 위한 것이며, 둘째는 처음에 이교도들이던 토착 원주민들을 복음화 하는 것이다. SPG는 대단히 엄격한 예산으로 상당히 소극적 활동을 하였다. 그렇지만 식민지 미국에 있어 성직자와 선교사들을 위해 절실한 필요를 잘 충족시켜 주었다.

 

영국과 미국 개신교 선교의 기원(A.D. 1750 - 1850) 

개신교 선교운동은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에 의해 출항되었다.  “위대한 세기(Great Century)”가 발단되기까지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의 공헌이 많았다. 윌리암 케리에게 더욱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제임스 쿡 선장의 여행이었다.

종교적 요소도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과 미국에서 발생한 복음적인 각성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케리 이전부터 사실상 선교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들은 영국에서 있었다. 1719년 아이삭 왓츠의 선교적 찬송가를 비롯하여 챨스 웨슬러의 동료들이 선교적 테마를 말하였고 1723년에는 페이슬리의 로버트 밀러가 “기독교 선포와 이교도 전복사”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이교도인들을 회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써 중보기도를 호소하고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영국의 어느 곳에 가든지 기도모임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요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을 회심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1746년의 7년“기도대회”는 신세계의 조나단 에드워드로부터 회신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에드워드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기도제목이  선포되었다. 40여년 후 1783년 에드워드의 소책자를 읽고 난  죤 서클리프는 영국의 모든 침례교회와 교역자들이 이교도회심을 위해 매월 첫 월요일을 연합 기도일로 정하도록 제안하게 되었다.

이즈음 윌리암 케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14세에 구두 제조 견습공이 된 케리는 18세에 회심하고 영국교회를 떠나 “이의자(異意者)들의 무리”라는 곳에 참여하여, 즉각 인근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침례교인이 되었고 26세에 죤 서클리프, 죤 라이랜드, 및 앤드류 풀러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교사였던 부친과 조부의 영향으로 향학열이 대단하였는데 손에 잡히는 책을 모조리 탐독했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및 화란어까지 배웠다.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으로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해외에 관계된 서적을 모두 읽었는데 구드리의 “지리학 입문”, 죠나단 에드워드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읽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덴마크 할레선교회, 뉴 잉글랜드의 죤 엘리오트, 및 모라비안 선교사들도 친숙히 아는 처지였다.

케리는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교도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최상의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는 이 책은 기독교 역사애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교회사에 끼친 영향은 루터의 95개조항과 나란히 설 정도로 귀하다. 그는 결코 책상 머리에만 앉아 있는 전략가가 아니었다. 행동으로 즉각적 수행했고 그 목표는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 할 수 있는 어떤 기관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사방에 수많은 장애물들이 널려 있었다. 1792년 10월 2일 저녁 12명의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위도우 윌리스의 넓은 집에서 모여 이교도 복음 선포를 위한 특별 침례교 연합회를 구성하였고 레이놀드 호그가 회계로 앤드류 풀러가 총무로 뽑혔다. 이 선교회는 개인 헌금으로 재정을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하는 일에는 난제가 수북하였다. 아내의 거절과 아버지의 몰이해 등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1793년 6월 13일 인도로 출항하였고 40년 간의 선교는 계속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하여 많은 선교기관이 창설되었다. 즉 런던 선교회, 스코틀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델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 미국 침례 선교 협회, 미국 성서공회 등이 있다. 

 

미국의 선교

사무엘 밀즈는 1802년 어느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4년 후 윌리암즈대학에 입학하여 거기서 선교의 불을 붙였고 결국 그 불꽃은 땅끝까지 번져 나갔던 것이다. 제임스 리차드스, 프란시스 로빈즈, 하비 루미스, 고든 홀, 루터 라이스 등, 당시의 형제회로 알려진 그들이 캠퍼스 근방 단풍나무 숲에 자주모여 기도와 토론시간을 가졌는데 어느날 폭풍으로 건초더미 곁으로 옮겨 기도를 계속하였고 끝난후 그들이 미국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서명하였는데 그들은 그로부터 “건초 그룹”이라 알려졌다. 졸업후 일부가 앤도버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후에 져드슨, 밀즈, 노트, 및 뉴엘은 탁월한 져드슨의 지도로 선교 문제 연구소를 조직하였다. 1810년 6월 28일 매사추세스 회중 목회자 총회에 참석한 그들은 선교 사업에 자신들을 투신하고자 하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해외 선교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10년 9월 5일  파밍톤 1차회의에서 14개조항의 회칙을 채택하고 새로운 사업의 지원을 위해 기독교 대중에게 보내는 글을 준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개신교 세계 선교의 거의 70%를 담당하고 선교 재정의 80%를 맡게된 미국의 해외 선교의 소박한 시작이었다.

초창기부터 이 위원회는 해외 선교 뿐 아니라 국내 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제2차 총회(매사추세스의 워세스터)에서는 “본 위원회가 본 대륙내의 이교도 선교에도 관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표하게 되었다. 1817년에 시작하여 1883년까지 계속되면서 선교 사업은 많은 인디언을 상대로 수행되었는데 15개 부족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해외 선교는 맣은 당면한 어려움 가운데도 런던 선교회의 지원과 협력으로 버마를 최초의 선교지로 정하기로 작정하였다. 제3회 년차 총회는 1812년 9월에 하트포드에서 개최되었는데 위원회에서는 선교 활동에 필요한 네가지 분야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즉 (1) 고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 (2) 원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 (3) 고대 기독교 교회권에 속한 사람들 및,(4) 이슬람교에 속한 사람들 등이다. 위원회에서 정식 선교사로 져드슨, 노트, 뉴엘, 홀 등의 4명을 임명한 것은 제2차 연차 대회 때였다. 재정에 문제가 되었지만 1812년 2월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눠 미국을 떠난 그들은 4개월만에 인도에 도착하였고,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선교는 다른 지역에도 신속히 진행되었다. 1816년 실론, 1820년 근동, 1830년 중국, 1834년 마두라 등이다. 한편 1812년 2월 6일 살렘의 성 전에서 앤도버 신학교 출신의 동료 4명인 뉴엘, 노트, 홀, 라이스와 함께 안수를 받았던 져드슨은 살렘과 켈커타 사이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꿔 도착하자마자  윌리암 워드에 의해 침례를 받고 솔직한 태도로 회중 위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미국에 있는 침례회에서 사역을 계속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1814년 5월에 기구가 조직되었는데 현재의 미국 침례교 해외 선교회가 바로 이것이다. 져드슨은 이 선교회에서 최초의 가장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 후 동인도 회사에 의해 인도를 떠나 랭구운으로 갔는데 1813년 7월 13일 제2의 미국 선교를 발달 시키게 되었다. 그외에도 많은 선교단체들이 계속해서 구성되었는데 1819년 감리교 감독 교회, 1821년 개신교 감독 교회, 1831년 장로 교회, 1837년 복음 루터 교회 및 기타 다수의 교단에 의한 것들이었다.

 

동양과 서양에서의 새로운 출발(1600 - 1800)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교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희랍정교회(Orthodox)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의 선교는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이루어진 노력들과 비교할 때 희미한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방교회는 소아시아를 거쳐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심장부까지 밀고 들어온 이슬람의 진출과 이교도들인 타타르족의 러시아 진출 등 양차의 대 타격으로 그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풀의 함락은 동방제국의 몰락일 뿐만 아니라, 희랍어-교회의 위대한 선교 역사의 종언을 뜻했다. 19세기에 와서 이 교회들은 그 지역 국가들의 정치적인 독립과 더불어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활동은 러시아가 정신을 수습하여 그 독립성을 다시 주장하고 공격적이며 확장적인 그리스도교 세력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오랜 후에 재개되었다.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인한 하나의 결과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민족의 참된 통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고난의 공동 피해자들인 슬라브족, 스칸디나비아족, 핀족등 여러종족들이 공동의 원수에 대한 저항으로 단결의 토대를 마련케 되었다. 물론 타타르족 지배하에 있던 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83년 페름교구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수년간 그곳에서 활약한 스테판 차르프가 가장 유명한 선교사였다.

타타르족은 본래 무슬림교도가 아니었다. 1세기후에 무슬림이 되었지만 광신적이지도 남을 핍박하는 열심도 없었다. 그러나 볼가강 유역의 새로운 칸국들의 강경함은 선교적인 열성과 마주치게 되었고 급기야 1454년 콘스탄티노풀의 함락으로 러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와 이슬람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때부터 모스크바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도시를 “제 삼의 로마”라 부르며 비잔틴 세계의 후사와 투사가 되었다. 이반 3세(1462-1505)는 콘스탄티노풀의 마지막 황제 요안네스 팔래올로구스의 조카를 두 번째 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때부터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자신을 비잔틴 왕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그는 이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를 응징해야하는 제 2의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래서 뇌제(雷帝) 이반 4세(1533-84)가 1552년에 카잔의 타타르 칸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은 그에게 하나님의 성전(聖戰)이었던 셈이다.

일단 팽창작업이 개시되자 러시아 세계의 지리적인 확장은 놀라울 만큼 신속히 전개되었다. 1586년 토볼스크 시 건설, 1619년 예니세이 강 횡단, 1632년 현재의 야쿠츠크의 근처에 있는 레나 도달, 1648년 최초로 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데지네프는 이스트 케이프를 돌아 베링해협을 발견하였다.

 러시아 교회의 첫 번째 활동은 새로운 개척지로 쏟아져 들어가는 러시아 교인들의 요구에 대한 최소한의 공급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신개척지는 세 개의 종교가 경쟁을 하고 있었다. 마술 혹은 샤마니즘이라 불리는 종교를 신봉하는 물활론자들과 티베트식 불교인 라미교, 그리고 이슬람이었다. 시베리아를 기독교화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겨우 피오트르 대제의 치세중에 시작된 일로 1700년 6월 17일 우카즈(제정러시아의 칙령)를 공포하여 구체화 되었다.

종교적목적과 정치적목적이 함께 추구된 것이다. 러시아선교의 특징은 거의 예외없이 교회와 국가간의 유착이 너무 깊기 때문에 구성요소 속에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1. 서 시베리아의 선교

1702년 1월 4일에 필로페이 레스친스키가 토볼스크 감독에 임명되어 1721년까지 많은 실망을 맛보며 오스티크아족, 보굴족, 야쿠트족, 그외의 지역부족들을 개심시켜 나갔다. 선교사의 부족과 필로페이의 사망으로 더 큰 혼란에 빠진 선교사업은 실베스터 골로바키 감독의 부임과 함께 새로운 부흥이 시작되었다.

 

2. 중국 선교

17세기 말부터 일부 군대 탈영자를 포함한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북경에 거주해 왔다. 쇄국정책의 중국이 거절한 러시아 사제의 북경거주가 허락된 것은 키아크타 조약(1227년)에서 러시아 황제가 몽고에 대한 중국의 정당한 주권을 인정해 주고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사제의 수는 네 명으로 제한되었고 러시아 선교회는 18세기를 간신히 끌고 갔다. 전반적으로 예수회 수도사들과 그들의 후계자들과의 관계는 순조로왔던 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빈곤과 영향력의 부족으로 이전에 로마 카톨릭이 누렸던 지위 그리고 그들이 황제의 총애로 확보할 수있었던 안정성과는 너무도 서글픈 대조를 보여 주었다. 선교회는 선교하는 일 외에도 연구소로도 봉사하였다. 18세기만해도 상당수의 저명한 동양학자들이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초라한 시대였다. 1795년에 보고된 북경교회의 교인 수는 25명의 러시아인과 10명의 중국인에 불과했다.

 

3. 칼묵크 선교

우랄산맥의 동남쪽 고원지대에 살고있는 유랑 민족인 칼묵크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추장선출을 둘러싼 분쟁에 러시아인들이 개입함으로써 처음부터 크게 체면을 잃었다. 러시아인의 지원을 의도하고 세례를 받았던 추장후보에게 사제 한사람을 배정하여 선교하려던 수도승 니코딤 렌키이비치(1673년생)의 노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된 칼묵크족에게 정착지를 제공하려는 노력도 결국 허사였고 유목을 좋아하는 그들이 러시아 생활방식에 젖어 이중적 생활을 하는 라마교도적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1780년 주임 신부 추보브스키가 보낸 보고의 내용이다.  

 

4. 볼가강 중류지역 선교

이 지역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보상과 호의의 결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표면상 성공적이었다. 피오트르대제는 세례받은 자들에게 군복무를 면제하는 특권까지 추가하였다. 1701년에서 1705년까지 3,638명의 체르미스족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들이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이 1730년대에 밝혀졌다. 그것은 세례자 명부가 정확히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혜택이 제공될 때마다 그 혜택을 받을 마음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례를 두 세번씩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 선교는 카잔의 정력적인 총주교 루크 코나세비치(1738-55)의 재임 기간에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가 세운 “새 신자의  사무소”의 보고에 의하면 1741년에서 1762년까지의 20년간에 추바쉬, 체르미스, 오스티아크 및 그 밖의 부족에서 430,550명이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단 한 명의 이교도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무슬림을 신앙하는 타타르족은 감언이설과 위협을 다같이 거부하였다. 세례 받은 사람은 8,310명에 불과했다.

 

5. 동 시베리아 선교

1682년에 13명의 선교단이 “레나와 다우리아에 있는 외딴 도시들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코사크족의 습관을 받아들여 토인들을 사서 세례를 준 후수도원 토지에서 농노로 일하게 하였다. 그래서 몇교회가 생겨났다.그러나 이 선교사들을 대치시키는 후속 지원이 없어서 1733년 첫 번째 선교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1727년 이르쿠츠크가 독립교구로 승격되었고 첫 감독인 인노센티 쿨치스키가 4년동안 재임했으며 1805년 교회는 그의 남긴 거룩한 인상을 기려 성인으로 공인하였다.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인물은 시릴 바실리에비치 수카노프(1741-1814)였다. 이 평신도는 전생애를 다우리아의 퉁구스족들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유목민들의 사이를 쉴새없이 오가며 그들의 진정한 사랑을 얻어 1776년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신앙뿐 아니라 농업과 수공업의 기술을 가르치고 좀더 정착적인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 자신의 직함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는 이르쿠츠크에가서 미카엘 미트케비치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자신이 선택한 땅으로 돌아와 헌신하였다.

 

6. 캄차크 선교

거의 발견 당시부터 캄차크 반도는 군사 기지와 유형지로서 사용되었다. 최초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한 사람은 대수도원장 마르티니안이었으나 1717년에 살해되었다. 캄차크반도의 진정한 사도는 이오아사프 초툰세브스키였다. 초기는 평판나쁜 러시아인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반도를 선교사들이 둘로 나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2년후에 보고서는 토착 그리스도인들의 수준이 러시아인 이주인보다 높다고 되어있다. 1748년 11,574명의 교인수를 보고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착지로 생각되는 그 지역에 특별한 선교활동이 필요치않다고 보고했다. 주민의 반란으로 수도사 1명, 학생1명, 목사2명이 희생되었다. 1766-7년 겨울에 천연두 전염병으로 4명의 사제를 포함하여 주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이때에 교회가 입은 타격은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충분히 치유되지 못했다.

 

7. 아메리카 선교

1728년 덴마크 태생의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정확한 판단을 가지고 아직도 자기이름으로 불려지는 그 해협을 건넜다. 알류우샨 열도는 1743년에 발견되어 1766년에 러시아 영토로 병합되었다. 1770년에 러시아 상인 셀레코프가 이섬으로 무역선을 파송하였는데 기독교 선교사업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이 평신도의 기업적 모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787년에 셀레코프는 상원과 교회 회의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이 응락되어 대수도원장 이오아사프 볼로토프가 4명의 수도사와 2명의 집사와 2명의 평신도 수도사를 대동하고 1794년 1월 24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였다. 기독교에 대단히 우호적인 그들이 한 겨울 세례받은 사람의 수가 코디아크 섬 한 곳에서만도 6천명이 되었다. 1796년 보고된 그리스도인 숫자는 1만명에 가까웠으며 선교사업은 아메리카 본토까지 확대되었다. 1797년 4월 10일 이오아사프는 이르쿠츠크에서 감독으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돌아가던중 배가 침몰하여 부풀었던 소망은 성취되지 못하였고 그 후 몇 년동안 보드카 술과 질병이 알류우샨의 단순한 백성들을 크게 괴롭혔다.

러시아의 확장 과정은 책략과 위압, 뇌물과 영웅적인 열성, 그리고 사도적인 단순성과 즐겨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려는 정신이 이상하리 만큼 혼합된 역사였다.  2세기에 걸친 수고의 최종적인 인상은 러시아 교회가 아직도 중세에 속해있다는 아니면 그보다도 더 옛 시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 혼돈스러운 시대의 혼란과 어두움으로부터 19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취의 일부가 솟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종교 개혁의 프로테스탄트 세계는 선교에 대해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생존이 보장될 때까지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1685년 루이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함으로 말미암아 신교도들의 생존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또 그들은 상호간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기 보다는 어디에서나 명예스럽기는 하지만 맹목적이고 무모한 열성을 가지고 끝없이, 완고한 루터파 대 필립주의자, 루터파 대 개혁교회, 예정설의 칼빈파 대 아르미니안파, 앵글리안 대 청교도와 독립파등으로 분열하여 논쟁을 일삼음으로 정력을 낭비하였다.

이런 내면적 약점 말고도 유럽 이외의 광대한 세계와의 접촉을 갖고있지 못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해양로를 완전 장악하여 정치적 종교적 제국주의를 수립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더욱이 독일인들의 활동은 대부분 국내에 제한되어 있었는데 Cuius regio, eius religio 즉 그의 영토안에서 만 국가일과 식민의 영적 안녕을 통치자가 책임진다는 지리상의 테두리 속에 완전히 폐쇄된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17세기에 와서 영국과 화란이 대 해상세력으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기류의 변화는 대단히 느리게 진척되었다. 17세기말 로마 카톨릭의 논객이었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네는 참된교회의 18가지의 특징중에 그 교회의 선교 활동을 포함시키고 선교활동이 전혀 없던 프로테스탄트를 힐난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자신들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였다. 세계에 복음을 꾸준히 전파하여 나아간다는 사상은 루터에게 낯설은 생각은 아니였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글에서 모든 가능한 증거를 다 모은다 해도 너무나 적은 양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 게르하르트는 아드리안 사라비아 와의 논쟁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사도들로 끝났으며, 이미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 재차 복음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16세기에도 희미하나마 세가지점에서 선교사업의 출발을 내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푸스 바사가 1559년 이후 자국의 북쪽 변방에 아직도 이교도로 남아있는 랩족에 대한 선교사업을 장려했다. 독일 귀족 한스 웅나드 본 존넥크가 중심이 된 한 그룹이 남 슬라브어로 된 책들을 보급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원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577년부터 1581년까지 콘스탄티노풀에서 지낸 벤첸슬라우스 부도비츠 본 부도바는 1614년에 체코어로 쿠란에 대한 비판서를 폈으며 한 명의 투르크인을 개종시킨 것으로 보고 되었다.        

개신교회의 선교는 영국과 화란의 상업적인 모험의 성취로부터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기 시작한다. 세계적인 천재 휴고 그로티우스는 극동지방을 항해하는 화란 선원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의 개설서인 [ 기독교의 진실성(1627) ]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1622년 화란의 동인도회사에 의해 레이든 신학교가 설립되어 1633년까지 12명의 목사를 교육시켜 당시 화란령인 인도네시아와 실론에서 봉사케했다. 화란의 선교는 로마 카톨릭의 방식을 그대로 좇았다. 화란의 목사들은 동양에 거주하는 화란인들의 영적 안녕을 보살피는 공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토착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도 일했다. 17세기말 화란은 자바에서 10만, 암본에서 4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종자들의 신실성에는 개선의 여지가 상당히 많았다. 1688년 신약성경이 말레이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동남아의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1624년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인수한 대만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쳉쳉-쿵(鄭成功)이 거느린 중국 해적들에게 화란이 쫓겨나고 시도는 허사로 끝났다.

한편 영국에서도 식민지의 원주민에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고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에게 허가한 특허장에는 “영국민을 통하여 기독교 문화의 감화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들을 감추어 두었던 것 같다”고 하면서 가련한 이교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의 노력은 성과가 크지 못했다. 이 고귀한 목적의 지속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1632년 마사츠세츠주 록스베리의 목사가 된 장로교도 존 엘리오트(1604-1690)의 경우가 최초였다.  그는 즉각 이로쿼이의 피쿼트족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개종한 인디안을 위해 “기도하는 마을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엘리오트는 “모히이칸”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1661년에 신약, 1663년에 구약이 출판되었다. 엘리오트 사후 인디언을 위해 봉사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데이빗 브레이너드(1718-47)였다. 브레이너드는 죽었으나 최고의 경건을 지향한 그의 감동적인 글에서 영감을 발견한 윌리암 케리와 헨리 마틴과 같은 사람들의 생을 통하여 그는 계속 살아있다.

1701년에는 성공회 외방 복음 선포회(Anglican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왕실의 특허장을 받은 법인 협회로 설립되었다. 35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헌신적이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다. 1735년 뉴욕주 포트 헌터 수비대 사령관의 보고를 판단할 때 적지 않은 성공이 따랐던 것 같다.         

 유럽대륙의 교회가 선교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한 역사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서 비롯되었다. 16세기의 “성령운동”,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 영국 청교주의의 개인적인 개심의 강조 이 모든 것들이 경건주의의 기원과 관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경건주의 최초의 뚜렷한 표현은 필립 자콥 쉬펜너의 [ 경건한 소원 1675 ]이라는 책을 통하여 나타났다. 그의 목적하는 바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들을 상호 덕을 세우고 격려해 주는 여러개의 그룹으로 모으려 했던 것이었다.

경건주의가 교회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할레의 치이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는 유럽에서 인도에 보내진 최초의 비 카톨릭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현지 덴마크 주민들의 적개심, 퉁명스럽고 불쾌한 총독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들볶임, 유럽인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기 위해서 파견된 덴마크 성직자들의 악의, 코펜하겐의 오해와 편견들, 상류 카스트의 미움, 하류 카스트의 관심 부족, 로마 카톨릭의 모멸적인 적대감 등, 끝이 없는 어려움들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인내로 극복하며 5개의 선교원칙에 따른 선교형태가 나타났다.

    1. 교회와 학교를 병행하여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면 그들의 글자로 기록된 말씀을 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치이겐발크는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714년 완결하였고 구약도 죽기 전 까지 룻기까지 진전시켰다.

    3. 복음은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전파되어야 한다. 치이겐발크는 실제로 그들 종교를 세밀히 연구하여 신랄하게 비판 받고 1867년에 1세기 반이나 지나 출판되었던 [말라바르 신들의 신통기]를 유럽에 있는 본부에 보냈다.

    4. 목적은 명확히 개인적인 개심이어야 한다.

    5. 가급적이면 속한 시일 내에 교역자를 가진 인도 교회를 출현시켜야 한다.

이곳에서 선교의 기초를 세운지 3년밖에 되지 않는 1709년에 치이겐발크가 보낸 편지에는 완전한 교회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선교지역의 교인 한 사람에 필히 “신품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실지로 최초의 인도인 목사인 아아론이 1733년에 안수를 받았다. 1백년 선교에 안수 받은 목사의 수는 고작 14명이었다. 치이겐발크가 사망했을 때 트랑크바르에는 350명의 기독교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루터교회는 남인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이었다.

오래지 않아 선교사들은 트랑크바르란 조그만한 세계에 갇혀있는 일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덴마크 왕은 자기가 보내는 돈은 오직 트랑크바르의 사업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 외의 어느 곳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누구의 영토냐(Cuius regio)의 원칙은 신성불가침이었다. 이 시점에서 S.P.C.K가 나서서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을 지원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당시 상당히 에큐메니칼한 태도로 “영국 선교구”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여러 경우에서 자신들의 기능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본래 덴마크 국왕에 의하여 파송된 독일선교사들인데 S.P.C.K에 의하여 인수되었고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뜻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국 군대와 영국인 공동 사회의 전속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것이다.

남인도에서 48년간을 봉사한 크리스챤 프리드리히 쉬바르츠(1724-98)는 그 가운데 우뚝선 선교사다. 그는 말기에 탄조레 왕국 의 실질적 디완(수상)의 궁정의 영국 특명대사로도 출입했는데 매우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선교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여 탄조레교회는 그의 지도 아래 2,000명을 가진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사후 당시 인도의 여러지역에서 선교사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던 동인도회사가 그들의 경비를 들여 마드라스의 포르트(Fort)교회에 쉬바르츠의 기념관을 세운 사실은 이상한 일이며, 그의 은고를 입은 젊은 라자(인도의 왕) 사라보지도 대리석 기념비를 세웠다.

사실 그의 말년은 서글픈 생애였다. 유럽의 선교적 열성이 쇠퇴해지고 교회가 선교구들을 적절히 지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사망 직전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윌리암 케리의 벵갈 도착과 인도에서 최초로 프로테스탄트의 대중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코펜하겐 선교대학의 첫 열매의 하나는 한스 에게데의 그리랜드 선교(1722-36)였다. 그는 온갖 고생을 다하여 에스키모어를 배웠으나 이 언어가 기독교 진리를 표현하기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에게데가 그의 천성적인 교만을 극복하고 그의 양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 것은 1733년에 유행했던 그 끔찍한 천연두 때문이었다. 1734년 다시 덴마크에서 돌아온 아들 파울로 인하여 그리랜드 선교는 활기를 띠었고 일종의 종교적 부흥이 디스크만 일대에 일어났다. 파울은 그들과 함께 자랐기에 그들의 말을 잘했다.

1731년 친젠도르프 백작이 코펜하겐에 와서 에게데에게 세례 받은 2명의 에스키모인을 만나고 그리랜드의 선교가 포기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즉각 헤른후트의 그의 신앙의 형제들을 불러 이 난국을 극복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는 후에 1737년 형제교회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았으며 그 나름의 경건주의를 발전시켰는데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에게 깊이 헌신할 것과 그의 의지에 철저히 굴복하고 헌신할 것을 강렬하게 요구하였다. 1732년 8월 21일 모라비아 교회는 선교의 첫발을 내디디었다. 1733년 5월에는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그리랜드에 도착하였다. 모라비안들은 에게데의 약점을 들추었다. 에게데를 공격했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던 모라비안 가운데 한 선교사는 1740년 선교방식을 크게 변경시킨 사실과 그 변화의 경과를 기록하였다.

 아프리카의 단 하나의 고립된 사례는 S.P.G선교사로 5년간 뉴 저지에서 일했던 토마스 톰손이 1751년 흑인에게 봉사하기위해 현재의 가나로 불려지는 황금해안으로 떠났다. 선교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그가 보내 영국에서 공부한 12세의 3명의 아프리카 소년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필립 퀘이크가 1759년 1월7일 세례를 받고 1765년 최초의 성공회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50년 이상을 “선교사, 학교장, 교리교사”로서 봉사한 후 1816년에 사망하였다.

미국의 경우는 당시 선교지였다. 그래도 보스톤 회중교회의 저명한 목사 코튼 메더는 할레 대학의 프랑케, 그리고 트랑크바르의 선교사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신학자인 동시에 부흥사이며, 후에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으로 일했던 조나단 에드워드(1703-58)는 선교의 계획을 자신의 중심적인 관심으로 삼고 그것을 선교를 위한 “전세계적인 기도 협약”이라는 사상에 연관시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이 정신이 에드워드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국 그는 이 계획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는데 이 책이 바로 “성경의 약속들과 말세에 관한 예언들에 의거하여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의 출현과 신앙부흥을 위해 특별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명한 의견의 일치와 눈으로 볼 수 있는 연합을 촉진하기 위한 소박한 시도”이다. 1748년 초판된 이책은 계속해서 재판되면서 개별 및 집단적인 기도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지평을 확장시키고 또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 문제제기

1. 종교개혁기의 개신교 세계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부정적인 관점이 문제가 되었는데 칼빈과 루터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하여 저자의 문제제기는 타당한 것인가?

2. 선교회의 구성을 결안하는 것과 실제로 선교를 수행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저자는 윌리암 케리의 “이교도 복음 선포를 위한 특별 침례교 연합회” 구성 후의 상황을 표현하였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요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현대 교회안에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가정, 재정, 선교지 문제, 교단, 선교 기관 및 단체, 정보, 전략, 지도자 등)

3. 그리랜드의 선교에 있어서 에게데의 사역이 아들 파울의 사역에 미치지 못했던 이유는 언어의 문제였다.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2세 선교사의 사역이 절실하다 하겠다. 이를 위한 대책으로 어떤 방안들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