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부리와 김정웅 선교 History 39
<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39) >
대선배님의 터 위에서!
해방후 처음 태국 선교사로 최찬영, 김광명 선교사님 부부가 1955년 4월 24일 임명받으신 날이, 필자의 만 11살 생일날인 것이 우연한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사바사바(뒷거래)가 아니면 통하지 않던 때라 정직하게 하려 하시니, 1년 이상 걸려 겨우 여권을 받아, 홍콩을 거쳐 배로 방콕 부두까지 들어오는 선교사로 오셨지만, Fraternal Worker로 태국 총회가 숙식을 다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6,25가 막 끝난 허물어진 조국을 배경 삼아, 당시에는 우리보다 더 잘 살고, 한국전에 참전해 준 태국 왕국에 선교사로 오셨던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 목사로서는 찾기 힘든 미국 유학의 길이 다 준비되었고, 사모님도 미국 병원에 의사로 가시기로 다 약정된 채로, 잘 준비된 선교사로 발탁되어 순종하고 오신 것이다.
초기의 어려웠던 상황을 후배 선교사들에게 간증하시며, 교회 종탑 2층을 숙소로 사용하셨는데, 그때가 사모님이 임신 3개월로 저녁에 화장실을 가려면 같이 내려와, 교회 마당 저 멀리 있는 화장실까지 꼭 동행해 주어야 하는 일이 힘드셨고, ‘치앙마이’를 가는데, 당시는 기차가 ‘람빵’까지 가서 강을 걸어서 건너가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태국 총회장이 자기 가방을 잊어 버리고 두고 왔다고, 다시 강을 건너서 가져오라는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그 뒤로 방콕의 제2교회인 ‘쌈얀’교회 담임 목사로도 수고하셨다.
나중에는 태국 성서공회 총무로 각 절간에 성경을 다 기증해 배치하도록 하셨고, 그 후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로 필리핀 마닐라에 가셨고, 세계성서공회 총무로 중국의 ‘애덕’인쇄소를 통해 세계에서 제일 큰 인쇄소를 믿음으로 시작해 중국어 성경과 70여개국 성경을 합법적으로 계속 찍어 낼 수 있도록 대로를 터 놓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최찬영 선배님의 믿음과 배짱을 보시고 이뤄 놓으신 걸작품이다.
자세한 사정들을 여기서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주요 기사만 별도로 보실 수 있게 할 것이다.
지금도 현역으로 선교지를 돌보고 후원하시며, 중요한 세계적인 선교대회마다 참여해 격려하시고, KSM(한인시니어선교사) 30년 이상되신 시니어 카톡방에도 참여해 나눔의 글들을 다 읽어 보시고 격려해 주시는, 든든한 대 선배님들의 터 위에서, 우리 후배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선교사가 태국 선교를 시작한지 60주년이 된 기념식에서, 45년된 신홍식 선배님과 40년된 저도 곁에 설 수 있는 영예를 가졌다.
최근에는 LA에서 황금기선교 운동의 고문으로 김정한 선교사님과 함께 맹활약을 하고 계신다. 이제는 두 분 다 천국에 가야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