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부리와 김정웅 선교 History 79
<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79) >
바울의 집과 태국 선교지로!
안식년을 마치고 KIM 본부 바울의 집에서 원감으로 김익배, 신종환, 임경철 선교사 후보생 가족들의 선교사 훈련에 동참하는 일과, 본부 사역을 도우며 회원교회를 재정비하고, 6개월 만에 선교지 태국으로 재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인도네시아로 갈 김익배 선교사님 자녀들에게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으니, 바나나가 먹고 싶다고 하여, 시장에서 당시의 거금 20,000원을 들여 바나나 한 송이를 사 준 것과, 인도네시아에서 보내준 선물 과자를 주었더니, 그 과일 맛을 보고 한국 과자와 비교해 너무 맛이 없으니, 인도네시아에 안 가겠다고 어리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태국에 재 부임한 여러 KIM 선교사들과 팀 사역을 하는 데, 태국 대표되는 신홍식 선교사님이 선교사들의 회의는 선교사역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한인교회 금요 심야 기도회를 마친 후 정기 회의를 시작해 철야 회의를 마치고, 아침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드시고 신홍식 선교사님은 BIT 신학교 강의를 가시고, 다른 선교사들은 북태 ‘치앙마이’로 양병화 선교사 가정이, ‘프레’로 박선진 선교사 가정이, ‘람빵’에는 감정웅 선교사가 각자 차로 손수 운전해 떠났고, 남태의 먼 길인 ‘나콘씨탐마랕’에는 김중식 선교사 가정과, ‘펫부리’에 한준수 선교사 가정이 철야 후 아침 각자 차를 운전해 각자의 선교지로 흩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회의 방법이었으나, 선교사는 그렇게 희생해야 되는 줄 알고 고생을 사서 감당을 하고 있었다.
당시 팀 사역을 하고, 재정도 전체를 한 pool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안 팀 사역의 원리인 줄 알고, 적은 수입을 쪼개 나눠 가지려고 회의 때마다 신경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정해진 행정비내에서 기도편지를 한 장이라도 더 쓰면 우표값 등 그만큼 지출이 늘어나고, 선교비가 더 들어와도 내것이 아니고 공동경비가 되니, 점점 악순환이 되는 것을 보고 제안을 해서, 선교편지를 실비로 많이 쓰는 자에게는 많이 지불하도록 하니, 다 열심히 선교편지들을 써서 선교비 수입이 늘어 나게 되었다.
한번은 제가 신홍식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가셨을 때, 대신 반지하실과 같은 1층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침실 바닥까지 홍수로 물이 들어와 침대밑에 보관해 두었던 역사적인 칼라 사진들이 다 붙어 버렸다.
귀한 자료들이 손실된 것을 보며, 귀한 선교자료들은 홍수와 화재나 도난에 대비한 대책이 필요하고, 사진들도 가능하면 몇 군데로 복사해서 분산해 두어 보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요즘은 파일로 금방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고, 좋은 세상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