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마 이야기/선교 강의

통전적 선교신학

by 임도마 2022. 10. 12.

통전적 선교신학_다렐 구더

선교행정연구소/선교 자료 2011-05-21 15:41:12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다렐 구더 

 I. 통전적 신학이란 어떤 의미인가?

  통전적이란 단어는 오늘날 많이 사용되고 논의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사용되기 때문에 온갖 연상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 선교의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개념으로 전달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관념 철학에서부터 “뉴에이지 종교”에서까지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최근의 한 저자는 “통전적 선교”에 대한 발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단어 대신에 “통합적 선교”(integral mission)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바로 “통전성”(holism)이란 단어가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신학적으로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1) 저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부정적 측면이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통전적 선교신학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좀더 조심스럽게 정의를 내리면서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통전적 선교”에 대하여 생각함에 있어서 저는 먼저 성경적 어원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전적”이란 단어는 헬라어 형용사 HOLOS에서 파생되었는데, 이것은 신약의 몇 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HOLOS는 ‘전부의’, ‘온전한’, ‘분리되지 않는’, ‘전체의’(영어 단어 whole은 헬라어에서 파생된 단어임)라는 뜻으로 이 단어의 의미는 마가복음 12:30의 “가장 큰 계명” 부분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고려하면 더욱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네 마음(의 전체)을 다하고 목숨(의 전체)을 다하고 뜻(의 전체)을 다하고 힘(의 전체)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구절에서 “모든”(ALL)으로 번역된 형용사는 각각 헬라어 HOLOS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전적이란 포괄적이며 모든 차원과 측면을 포용하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철저하게 그것에 의해서 규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HOLOS 란 복음의 포괄성을 말하는 헬라어 단어 “충만함“(fullness)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저는 “세계 혹은 우주”(COSMOS)를 창조된 전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고, ‘PAS, PANTES’를 전부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신약의 ‘통전적임’(holism)이란 단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의 영역이 우주적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고 포괄적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통전적이란 단어를 신약에서 찾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모든 자들]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였으니”(마 28:18)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함께 섰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모 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모든 만물로 그와 화목하게 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7-19)

  아마도, 신약에서 가장 통전적인 본문이라고 주장될 수 있는 구절은 바로 빌립보서에서 바울에 의해서 인용된 위대한 그리스도의 노래에서 그 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우리는 언어적 연구를 통해서, 통전적 선교신학이란 철저하면서도 포괄적이고 또한 모든 것에 포용적인 복음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함을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즉 HOLON이란 온전성, 통전성, 혹은 복음의 역동적인 중심성을 말합니다. 선교신학이란 세상 속으로 전파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복음 전파는 오순절 이후부터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사상과 행위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의 선교와 연결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성경적 증거들이 이러한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언급한 대로 신약성경의 증거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면 결국 선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Ⅱ. 통전적 신학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

  이러한 포괄적인 선교신학은 mission Dei, 즉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 선교신학적 접근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2) 하나님을 ‘선교하는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선교의 근거를 삼위일체에 두는 것은 매우 통전적인 접근인데, 그것은 즉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신학은 선교의 초점을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인격과 목적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신학은 교회의 존재 자체를 이해할 뿐 아니라 세상에 치유를 가져오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선교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전적 접근은 제2바티칸 회의 때의 유명한 “교회는 그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다”라는 표현에 매우 잘 나타나 있습니다.3)

  그러나 1960년도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대한 논쟁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되어왔기 때문에, 우리들의 논의에 있어서는 좀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논의는 HOLON, 즉 통전성에 대한 많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통전성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그것을 중심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즉 하나님의 목적인 구원 그 자체의 의미를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의 선교신학이라는 일반적인 제목 아래에서 한 접근은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정의에 근거하여 선교를 예수의 사역과 메시지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접근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에 뿌리를 두는 것인데 1950년 이후부터 많은 선교신학자들에 의해서 설명되는 방법입니다. 가장 최근에 하나님의 선교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접근을 시도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데이빗 보쉬(David Bosch)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입니다.4) 그러나 다른 접근들로 있었는데, 즉 예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보다 삼위일체적 접근으로 성령에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접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콘라드 레이저(Konrad Raiser)와 다른 인도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습니다5). 그런데 이 모든 학자들이 자신들의 접근을 “통전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성경적 증거에 신실하면서도 통전적 선교신학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Ⅲ. 보편성과 HOLON에 관한 논쟁

  신학적 다양성이 물론 나쁜 것이 아닙니다. 라민 사네(Lamin Sanneh)가 지적했듯이 복음이 무한하게 번역할 수 있는 것이라면6) 그리고 오순절 사건을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언어 체계와 기독교 운동의 다양한 기관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사건으로 해석한다면, 복음과 그 선교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접근과 해석이 당연히 기대되고 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다양성은 신약의 통전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휴스토 곤잘레스(Justo Gonzales)가 지적한 대로 “보편적”이란 단어의 중심 개념은 바로 “통전적” 즉 완전함, 가득함, 온전함의 뜻의 HOLON입니다.7) 헬라어로 보면 HOLON 에 KATA를 접두어로 붙여서 “카톨릭”(보편적)이란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HOLON 과 중심과 충만함과 신앙의 완전성과 관련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이란 단어를 ‘보편적’ 이란 단어로 일반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사실 그 실제 의미의 한 부분만을 내포할 뿐입니다. “보편성”(CATHOLICITY)이란 HOLON을 주위로 둘러싼 교회의 중심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즉 다양한 표현과 설명들이 중심을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HOLON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중심의 HOLON과 직접적인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보편성은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다양성과 함께 그 중심성 안에서의 일치를 함께 보유하는 것이며 따라서 복음의 전체성과 충만함과 완전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남는데, 그렇다면 HOLON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신앙과 교회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즉 다양한 전통 속에서도 서로를 연결하고 있는 그래서 결국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중심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세계 기독교 운동에 있어서 교회가 보편적일 수 있도록 만듭니까? 혹은 오늘날 에큐메니칼 논의에서 종종 표현되듯이 다양한 신학과 전통 속에서 무엇이 서로를 연결하는 공통점입니까?

  HOLON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비록 이 두 가지의 접근이 매우 다양하게 표현될지라도 대체로 두 가지로 근본적인 다른 접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근본적 차이점이 소위 통전적 선교신학의 결과에 심각하게 영향을 줍니다.

  첫 번째 접근 방법은 HOLON을 사상이나 원칙,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로 혹은 다양한 종교 전통 안에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거룩한 영’ 정도로 이해하는 접근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 견해는 하나님을 창조의 능력, 사랑과 정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정의가 성경의 특별한 이야기 안에서 표현되었고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결정적으로 본받을만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독교 메시지는 세상을 위한 복음이 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에 대한 인지적 가능성을 나누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정의를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견해는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사랑 받을 만한 존재로 이해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이 땅에 그의 정의를 이룩하는데 참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로 봅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과 행위의 놀라운 모범으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혹은 다른 이들에게도- 존경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신학적 접근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진리에 응답하는 유일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정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는 유일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영원한 진리는 다양한 문화 안에서의 종교 경험 안에서 획득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을, 즉 동일한 능력과 사랑과 정의를 표현하고 있는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현재 일하고 있는 다양한 종교의 문화적 형태 안에서 동일한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비록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매우 빛나고 매력적일지라도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가장 숭고한 이해에서는 근본적인 일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종교적 열망이 비록 다른 형태로 표현될지라도 항상 모든 종교적 열망 안에는 HOLON이 존재하고 그 핵심에 동일한 기본적 확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한 운동은 상호간의 대화와 용납을 향한 운동이 될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사랑과 정의를 위한 헌신과 가치관의 연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신학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기초적 진리의 요소들을 더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또한 이러한 선교신학은 계속적인 상호 향상을 위한 과정으로 선교를 이해하고, 개인의 거룩한 능력과 사랑과 정의에 대한 이해가 진리의 다른 표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확장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는 결코 HOLON을 한정할 수 없고 어떤 특별한 사건도 결코 결정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풍성함은 지구촌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들간의 만남과 연합을 통한 새로운 등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HOLON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비록 다양하게 표현될지라도 타종교 간의 대화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 내의 대화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된 경향은 복음을 인간화를 향한 노력으로 강조하며 교회가 인간화를 위한 세속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배타성은 모든 인간 종교의 전통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포용성으로 대치되어야 하며, 그래서 HOLON이란 예수의 선한 모범을 따라가고자 하는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시작된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전통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입장은 HOLON을 개념으로 보기 보다는 사건으로 규정하여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일정의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HOLON이란 성경의 이야기들이 증거하듯이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실제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HOLON은 사상이나 원리가 아니며 또한 일련의 가치관들도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한 이야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들로 구성되어있고, 특별한 사람들과 특별한 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HOLON은 한 개인인데, 즉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개인이십니다. 바로 그의 성령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구주와 구원자로 인식하고 깨닫도록 움직이며 행하십니다. 이러한 접근에서는1세기의 첫 30년 동안 팔레스타인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이 모든 사람과 모든 시기에도 진리이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로 들어오셨고 바로 그 사람의 생애와 죽음 과 부활이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었고, 그의 성령이 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교회에 힘을 부어주신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레슬리 뉴비긴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실마리라고 부릅니다.8)

  신약이 증거하기 때문에 모든 증거와 선포의 중심에 있는 HOLON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임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즉 모든 신앙에 대한 규정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세계’(COSMOS)와 ‘모든’(PSA/PANTES)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본문에서 매우 대담한 주장을 하는데, 즉 모든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유일한 효력에 의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오는 것은 거룩한 구원의 과정의 새로운 장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변화된 중심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증거입니다. 이러한 증거는 장벽을 넘고 번역되어 지속적으로 전달되어야 하며, 결국 새로운 증인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사도적 초청에 응답하여 이 새로운 메시지의 한 부분이 되며,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 혹은 징조 혹은 미리 맛본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수성이야말로 기독교적 증거가 전해지는 세계 안에서는 “스캔들이며 어리석은 것”입니다. 분명히 이러한 주장은 다양하게 표현되는 인류의 숭고한 종교적 업적 앞에서는 모욕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전통적으로 교회의 보편성으로 정의되는 것처럼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 다양성 안에서 HOLON에 복종하고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HOLON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서 성령이 이끄는 인간화의 비전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는 통전적인 접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오늘날의 전인류의 울부짖음을 만족시킬만한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며, 또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과 선교는 오늘날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경제정의 문제와 생태계의 재난과 종교 다원주의의 임박한 문제들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삶과 사역은 오늘날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에 중요한 안내자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십자가와 속죄는 세계의 급박성에 의해서 제기되는 교회의 의제들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 보편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HOLON이 바뀔 수 있는 것이며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역사의 진행 안에서 표면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도전들에 의해서 새롭게 적응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열려진 끝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든지 거룩한 진리를 만날 수 있고 새로운 발견을 통해 더 포함될 수 있고, 결국 완전함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기에 교회의 역동적 HOLON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될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됩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신학적 접근 속에서 신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도 다르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심각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비록 통전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현대는 전통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적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HOLON에 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합니다. 즉 교회를 세우고 그 증거를 시작하게 한 팔레스타인에서의 초기 10년 간의 사건들은 결국 기초적이긴 하지만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시작의 과정일 뿐 오늘날과 같이 큰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 이야기들이 인류에게 직면한 새로운 시대적 도전들로 인해 적합하게 재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 문명의 울부짖음은 고대 세계가 알지 못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던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현대의 문제들은 고대 이야기의 진리의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견해는 정반대의 주장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그 범위에 있어서 진정 우주적이며 모든 창조물을 포함하고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언젠가 그 완성의 때에 도달하면 그 정당성이 입증될 것이며, 이 선교적 복음의 통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텅 빈 무덤으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으로서 우리들의 시대뿐 아니라 인간 역사의 앞선 시대나 혹은 뒤 시대의 모든 장의 도전에도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HOLON에 대한 논쟁과 불일치는 궁극적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주신 질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대한 계속적인 논쟁일 뿐입니다. “나를 누구라고 사람들이 말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는 것뿐입니다.

 

Ⅳ. 계속적인 회심의 과정으로서의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우리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6)”라고 말한 베드로와 같은 대답을 우리가 할 때 이 고백이 예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또 “[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요 14:6)”하는 것을 확증하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정직성을 담아서 어떻게 통전적 선교신학으로 나아갈지를 연구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생깁니다. 통전적 선교라는 바로 그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선교를 이해하고 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관심을 가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 주제 자체가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즉 우리가 통전적 선교신학으로 향하여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최근의 선교신학이 적어도 통전적이지 않거나, 혹은 충분히 통전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이러한 비판들을 지지할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에서 다루어야 할 것들에 대하여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신학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여정의 정직한 평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한 특정 교회 전통 안에서 HOLON에 대한 고백이 우리가 연구하고 이해하고 진술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추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고백인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이 우리가 주 되심의 모든 영역을 발견하였고 그 아래에서 완전한 신실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과 교회를 그의 몸과 증인으로 고백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확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선언인데, 즉 “너희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온전함에 이르게 할 것이라(빌 1:6)”와 같은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어떻게 계속적으로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 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완성된 복음 사건이 우리들의 신조들과 신학들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 이상임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HOLON에 대한 인간의 설명인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올 자이신”(계 1:8) 그분에 대한 우리들의 증거는 진리에 대한 연약한 인간의 반응일 뿐이며, 깨어지기 쉽고 유한한 인간의 사고와 언어의 그릇을 통해서 표현될 뿐 결코 완전히 드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진리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하여 계속적으로 새로운 사고와 해석을 요구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즉 한번으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 HOLON의 특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미 의미 되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통전성의 온전함과 충만함의 계속적인 발견을 나는 “교회의 계속적인 회심”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9) 이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과정이 아니며, 또한 좀더 효과적인 번역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실체와의 계속적인 만남의 질문이며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의 보편성을 규정하는 HOLON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회개의 필요와 사고 행위와 고백 행위와 역사 속에서의 신학화의 움직임으로서의 회심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러한 계속적인 필요성에 대하여 로마 교회에게 권면하면서 “더 이상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세상과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복음의 의미의 차원을 더 발견함으로써 “계속적인 회심”의 과정으로서의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Ⅴ. 통전적 선교와 세계

  여러 세기 동안 유럽 전통 안에서의 기독교회는 신약에서 말하는 “세상”, “세계”(cosmos)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계는 바로 서구 기독교 왕국의 경계 속의 세계였습니다. 거의 1000년 동안 유럽의 기독교화한 문화는 자신들의 경계밖에 다른 기독교 전통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단지 극소수만 동방 정교회의 기독교 공동체가 지중해의 남쪽과 동쪽 끝에 있는 모슬렘 사회에서 소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이디오피아와 남인도와 이집트에도 고대 기독교회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 왕국은 그 자체를 표준적인 기독교로 인식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유럽 기독교 왕국이 자신의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서 세계를 향해 열기 시작 하면서 시작된 현대 선교 운동에 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과는 선교 운동이 전세계에 복음과 서구 문명의 유익을 전달하는데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라민 사네가 “확산으로서의 선교”10)라고 특징짓는 것으로 선교적 확장, 즉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를 비서구의 상황 속으로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세계에 대한 성경적 견해와 세계를 향한 사도적 선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낳았다고 비판 받았습니다.

  서구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 비판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러한 선교 운동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선교적 활동의 결과를 경험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지구촌 세계 안에서는 세계의 모든 중요한 문화적 영역 안에서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서울의 이 신학 교육 기관에 모이게 된 것도 비록 성경이 말하는 세계에 대한 서구 선교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 선교적 활동의 결과이며 세계 교회로 발전하게 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의 증거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세계, 즉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은 세계에 대한 성경적 비전에 근거한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 차원은 본질적인 보편성의 결과를 가져오는 성경적 HOLON에 핵심적인 것입니다.

  세계적 선교의 통전적 신학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HOLON의 특정한 문화적 변수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서구의 교회는 성령의 자유함과 신앙을 불러오는 능력을 존경하고 축하하며, 지구의 모든 문화 안에서 증인의 공동체들을 찾고, 성령의 자유함이 외형적으로 서구 교회의 전통과 거의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증인 공동체의 발생들을 가능하도록 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성은 신실한 증거를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상황화의 필요성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교회의 선교적 명령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합니다. 문화적 특징들과 인종들의 구별이 결코 한 특별한 교회가 그 상황에서 존재하기 위한 우선적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증인 공동체와 오랜 역사의 기존 교회 공동체가 각각의 다양한 문화 속에서 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동일한 복음을 선포하고 동일한 온전성으로의 회복을 보여주고, 부활절로부터 시작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의 동일하고 신실한 종말을 기대하는 것은 또한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계를 보다 통전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문화적, 신학적 또한 제도적 다양성을 기대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세계가 예루살렘부터 유대로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도착하게 될 때 필요한 것입니다(행 1:8).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한 우리의 움직임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선교하는 교회를 보낸 이 세계가 종교적으로 결코 중립적인 지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상은 이미 종교적 체계들과 주장들과 충성심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초기 기독교의 경우에도 적어도 서구에서는, 4세기까지와 콘스탄틴 프로젝트의 시작점까지는 사실이었습니다. 서구 기독교 왕국의 점증적 발전은 교회가 몸담는 사회적 상황의 급진적 변화를 의미하였는데 이 변화란 신약성경 시대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신약시대 교회의 일반적인 상황을 보면 교회는 다른 종교들 사이에서 소수 집단으로 있으면서 경쟁 당하고 저항 당하고 때때로는 박해 당했습니다. 서구 기독교는 그 문화가 “기독교화 됨으로써” 결국 다양한 종교 안에서 증인으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이해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다양한 문화적 상황 안에서 소수 집단으로 살아가거나 다른 종교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통전적 선교신학은 이와 같이 기독교가 종교적으로 지배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독교적 증거를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도전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약의 공동체가 어떻게 자신들이 속한 상황을 직시하고 세상과 상호 관련을 맺었는지를 조사함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그 목적은 기독교 공동체가 다양한 종교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로 무엇을 말하고 행하는가를 통해서 신실한 증인으로 세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진정한 임무는 이것인데, 즉 이러한 증거를 위한 세움이 세상으로 하여금 복음이 심판이 아니라 초대이며 해방이며 희망이라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Ⅵ. 통전적 선교와 공동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그래서 결국 교회를 보내신 이 세상과 관련하여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나가는 방법들에 대하여 조사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우리들을 교회 회중에 대한 주제로 인도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 즉 ‘코스모스’의 성경적 의미를 강조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한 특정 공동체로서의 지역 교회 회중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교적 증거들은 일반적 원칙과 추상적 명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들에 의해 지정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변화하는 능력의 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특정 지역 교회가 선교 공동체로서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의 일차적 도구라는 것은 선교신학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동의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의 일치가 세상 안에서 살고 있는 교회 회중의 실제적 삶과 실행에는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한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한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의 변혁 노력 즉, 계속적인 회심이 요청합니다.

  서구의 기독교 왕국에 있어서 여러 세기 동안 발전된 치명적인 환원주의 중의 하나가 바로 지역 교회를 구성원의 종교적 필요만을 채우는 것을 우선적 역할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체로 서구의 지역 교회의 모델인데 저는 이 모델이 현대 선교 운동의 과정에서 세계 전 지역으로 옮기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교회의 유지에만 관심을 집중할 뿐, 교회의 선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회중들의 성공을 사업으로 인식하여 강조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신실함을 강조하지 못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분명히 교회의 선교적 목적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적 증거의 결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증거를 지속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을 쓰게 된 동기였는데, 즉 이미 존재하는 증인 공동체가 그들의 선교적 사명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약에서 공동체의 삶의 신실성과 투명성을 강조한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신서 안에서 지역 교회의 회중들을 위한 분명한 가르침을 읽든지 혹은 사복음서 안에서 제자도의 훈련에 대하여 다루든지 간에,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한 우리들의 움직임은 항상 지역 교회의 회중들의 삶을 성경적으로 형성하기 위함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선교적 공동체의 기본적 패턴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존재하고 선교를 수행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봉사로의 부름이라는 것이며 성경적 형성을 통해 성령에 의해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새롭게 읽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계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하는데, 즉 “어떻게 이 텍스트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선교적 사명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또한 “우리들의 상황 속에서 복음이 온전히 번역될 수 있도록 성경 텍스트들은 어떻게 돕는가?” 혹은 “어떻게 성경 텍스트가 우리들의 상황 속에서 발견되는 문화들과 신앙적으로 타협하여 구속 받게 되는 것을 도전하는가?” 또한 “어떻게 성경이 계속적인 회심을 요청하는가?” 등등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비신앙의 세계에서 기독교 증거의 첫 번째 형태가 바로 구체적인 특정한 지역 교회로 특징 되고 실행된다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입니다(고후 3:2-3). 지역 교회의 공동체적 삶은 이 편지를 쓴 목적이며 교회가 흩어질 때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선교적 증거를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동체의 내부적 삶과 외부적 증거간의 근본적인 관계가 있는데, 즉 준비와 보내는 관계와 가르침과 격려의 관계, 분별함과 상호 세워줌의 관계입니다. 모인 공동체의 모든 행위들이 특별히 공적 예배 중에서 선교적 명령과 관련 있습니다.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하여 가는 것은 어떻게 우리들의 지역 교회 회중들이 행해야 하며, 어떻게 복음의 표현으로서의 우리들의 행위들을 세례 줌으로써 증인의 차원을 부여하는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통전적 선교신학이 문화적 다양성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면 우리들의 선교적 사명을 중요하게 다루는 교회의 연합(ECUMENICITY)에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조직적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증거의 신실성의 문제입니다. 문화적으로 다른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세계로의 보냄을 받을 때 중요합니다. 동일한 문화 안에서 교회가 분리되고 경쟁하는 것은 우리들의 소명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이며 우리의 증거를 매우 약하게 만들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동일한 문화 안에서의 증인 공동체의 모든 표현들이 다른 지역 교회의 형태와 행위에서 반드시 동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동일한 HOLON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교회는 공개적이고 확실하게 형제와 자매로서 동일한 아버지와 동일한 성령에 힘입어 동일한 주를 섬긴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선교의 통전적 관심은 우리가 전체적으로 똑 같은 교회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다양성 속에서의 우리들의 증거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간에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 다양성 속에서 증거하는 교회를 만났을 때 경험되어야 할 것은 중심에서 복음의 강력한 힘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이 교회로 하여금 통전적 증거 가운데 다양한 표현으로 이끌며 그 증거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으로 특징 지워 질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

 

Ⅶ. 통전적 선교와 이웃들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 불의 꽃 같은 상징적 존재가 그리스도인의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이 상징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신비로운 방법으로 공동체에게 임하게 될 때 고백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공동체 즉 선교사, 곧 그리스도의 대사임을 보여줍니다. 선교적 사명과 지역 공동체의 행위는 근본적인 관계가 있고 따라서 선교적 사명과 모든 기독교인들의 행위는 근본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통전적 선교신학을 향해 나가야 한다면 우리는 HOLON의 세계적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을 중요하게 다룰 뿐 아니라 개개인의 사도성, 즉 자신의 선교적 현장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보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통전적 선교의 차원은 신약에서 주로 이웃과 관련된 주제로 나타나고 있는데 실제로 이웃이라는 이 단어는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이웃이란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 내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를 떠나는 순간 특정한 선교 현장으로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우리들의 이웃들에게로 보냄을 받습니다. 선교적 도전은 바로 이웃을 나의 책임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는 곳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강도 만나 길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피하여 자신을 길을 간 것 같이 우리들도 이런 자들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세우시는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또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치료를 표현하여 보여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 나의 이웃들을 구별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웃의 정의를 제한하여 이해함으로써 증인의 부르심의 영역을 감소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회의 오랜 기간 동안의 끔찍한 반 유태주의와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 주의와 사회와 계급의 차별과 어떤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다른 이들을 무시하여 판단하는 모든 종류의 잘못들과 같은 것들입니다. 신약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사실로 우리들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남으로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님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자신들이 보냄을 받았던 이방인들을 이웃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새롭게 회심해야 하였습니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졌던 모든 장벽들을 넘어서서 자신의 이웃들 -즉 사마리아인들과 문둥병자와 어부들과 세리들과 창녀들- 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은 만지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전에는 멀리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다(엡 2:13-14)”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통전적 선교신학으로 향하는 운동은 교회가 이웃이 누구인지를 구별하고 얼마나 자주, 얼마나 쉽게 우리들이 우리들의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무시하는지를 배우는 것을 포함합니다. 도시화된 우리 사회에서 주위의 이웃들을 단순히 우리들을 위한 기능적 도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을 -예를 들어 웨이터나 웨이트리스, 버스 기사나 택시 기사, 청소부나 하녀들, 비서들이나 점원들, 사무실 일꾼들이나 여행사 직원들 등등- 진정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기도라는 영적 훈련과 이러한 사람들과의 매일매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치료하는 사랑을 번역하여 표현해 낼 수 있는지를 구별해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이 수준 높은 환대를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증거로서 보여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통전적 선교신학의 근본적인 패턴은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하시는 예수 자신의 선교사역의 묘사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통전적 선교는 우리가 예수의 눈으로 이세상을 볼 때 가능합니다. 예수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즉 무리와 함께 고난 받기 원하시고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고 치료와 완전함을 주시기 원하시며 상실에 대하여 돌봄으로 반응하시고 좋은 목자로서 돌보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통전적 선교신학을 생산하여 세상에 보여주고 증거 공동체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개개인이 우리 이웃을 향한 우리들의 선교를 해나갈 때 증명되고 표현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Bosch, David. “Mission as Missio Dei.” in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Maryknoll, NY: Orbis, 1991.

Flannery, Austin (General Editor). Vatican II: The Conciliar and Post Conciliar Documents.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75.

Guder, Darrell L. The Continuing Conversion of the Church.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0.

Newbigin, Lesslie. “Christ, the Clue to History,” 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89.

___________________. “Ecumenical Amnesia.”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vol. 18-no. 1 (January 1994).

___________________. The Open Secret: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Mission. Grand Rapids: Wm. B. Eerdmans, rev. ed., 1995.

Raiser, Konrad. Ecumenics in Transition: A Paradigm Shift in the Ecumenical Movement?. Geneva: WCC Publications, 1991;

Ramachandra, Vinoth. The Recovery of Mission: Beyond the Pluralist Paradigm.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97.

Ringma, Charles. “Holistic Ministry and Mission: A Call for Reconceptualization.” Missiology. vol. xxxii-no. 4 (October 2004).

Rosin, H. H. ‘Missio Dei’: An Examination of the Origin, Contents and Function of the Term in Protestant Missiological Discussion. Leiden: Interuniversity Institute for Missiological and Ecumenical Research; Department of Missiology, 1972.

Sanneh, Lamin. Translating the Message: The Missionary Impact on Culture. Maryknoll, NY: Orbis,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