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마 이야기/선교 강의

WCC 총회 역사

by 임도마 2022. 10. 15.

WCC 총회 역사

선교행정연구소/선교 자료  2013-11-01 17:48:00


WCC의 태동

1차 총회 : 세계를 향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인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가 공식 창립총회를 가진 것은 지난 1948년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다. 창립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전 세계는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수백만의 사상자와 수천만의 전쟁 피해자가 발생하는 등 일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타계하고 창조질서를 복원해야 할 전 세계 교회는 깊은 각성과 영적 성찰을 통해 세계 평화와 정의 실현을 지향하는 교회 일치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WCC 창립은 이 같은 요구와 지향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WCC 총회의 탄생 배경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WCC를 구성하고 있는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신앙과 직제 위원회, 삶과 봉사 위원회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국가에 복음전도” IMC가 모태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침례교회 인도선교사 윌리엄 케리는 1810년 세계선교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10년에 한번 함께 만날 것을 최초로 제안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이 이뤄진 것은 정확히 100년 뒤인 1910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에든버러 국제선교대회를 통해서였다. 이 에든버러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모태가 됐다.

  1910년 에든버러 국제선교협의회(IMC)에 대해 안양대학교 이은선 교수는 “이들은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모든 국가들 안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선언했다”며 “이 선교대회가 끝난 후에 참석자들은 하나의 대표기구를 만드는 것과 함께 선교와 관련된 문제들을 계속 논의하기 위해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계속위원회는 이후 아시아지역에서 여러 선교대회를 개최했지만, 제1차 대전(1914년~1918년)의 발발로 인해 더 이상의 국제대회를 진행할 수 없었다. 세계 1차 대전 직후 평화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 국제사회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국제연맹(오늘날 UN의 전신) 창립 논의를 진행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1919년 1월 동방정교회 총회는 교회연맹 창립을 제안했다. 국제선교협의회는 1921년 10월 뉴욕 14개국에서 온 61명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IMC를 공식 창립했다. IMC는 이후 개신교 선교의 기획기구이자 조정기구로 활동하면서 1927년 봄 예루살렘, 1938년 12월 마드라스 탐바라, 1947년 7월 온타리오 휘트비에서 각각 대회를 개최했다.

  1928년 예루살렘 IMC는 독일 대표들이 불참한 가운데 기독교 교육, 선교, 인종의 갈등, 선교와 산업사회, 선교와 농촌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강조됐다. 1938년 탐바라 IMC는 신생교회들의 참여가 크게 확대되었고 대표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또 크레머의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메시지’라는 글을 담은 ‘신앙의 권위’라는 제목의 공식 보고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크레머는 이 글에서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성격이 무엇이며 교회의 세계를 향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답해야만 한다”고 촉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열린 1947년 휘트니 IMC는 비용문제 때문에 많은 대표단이 참석하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 ‘기대에 찬 복음전도’라는 주제를 가지고 모인 참석자들은 “모든 선교단체와 선교사는 선교의 대위임령(마태복음 28장 19절)에 순종하는 동반자다”라고 선언했다.

 

WCC 역대 총회 주제와 신학

제2차 에반스톤 총회(1954) : 전쟁 폐허 속,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 외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교회는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1937년 WCC 창립 당시 북미 교회는 중앙위원회 60개 의석 중 12석(20%)을 차지했다. 하지만 에반스톤 총회에서는 총 90개 의석 중 22석(24.4%)을 북미 교회가 장악했다. 미국 교회는 재정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지원을 했다. ‘미국의 석유왕’으로 불리는 록펠러가 WCC본부 건물 구입비 54만불을 기부했다. 또 미국 교회가 WCC의 연간 재정에서 부담하는 비율은 1949년 82.9%, 1950년 81.6%, 1953년 78.2%에 달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제2차 WCC 총회는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개최되었으며, 총 161개 회원교회에서 502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2차 에반스톤 총회가 열릴 당시 세계는 냉전대립과 탈식민지화 운동이 고조되고 있었다. 먼저 1948년 동베를린이 봉쇄됐고,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결성되면서 미소 사이에 냉전 불럭이 형성되었다. 또 같은 해 중국이 공산화됐다.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탈식민지화 운동을 통해 신생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탈식민지화 운동을 통해 독립한 국가는 인도네시아(1949년), 이란(1953년), 과테말라(1954) 등이다. 특히 이란과 과테말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50년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탈식민지화와 신생국의 국가건설에 집중되었다. WCC 내부에서도 논쟁이 가열됐다. 서구교회와 신생교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 한국에 전쟁이 발발하자 토론토에 모인 WCC 중앙위원회는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유엔이 한국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촉구했다. 또 WCC가 초교회를 지향한다는 비난에 대처하기 위해 WCC의 본성을 밝히는 ‘교회, 교회들, 세계교회협의회’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1952년 빌링겐 IMC에서 복음을 삼위일체와 연결시킨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개념이 등장해 WCC 선교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48년부터 1958년 10년 동안 IMC와 WCC 사이에는 통합문제가 논의되었다.

  1950년 WCC 중앙위원회는 차기 총회 주제로 ‘그리스도, 세상의 소망’을 선정했다. 이에 대해 중앙위원회는 “세계는 거짓 희망,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총회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세상 모두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는 확증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주장은 WCC 헌장과 함께 향후 총회 주제들이 기독론을 반영하도록 방향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세계 교회는 교회들이 이념적 동서갈등, 경제적 남북갈등, 인종적 흑백갈등을 초월해 서로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총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과 그 안에 있는 종말론적인 희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종말론적 희망의 의미와 그 역사적 관련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도출하지 못했다. 유럽 교회들은 희망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했고, 미국 교회들은 그것을 현실적 낙관론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2차 총회도 1차 총회처럼 기독론 중심적인 ‘비교교회론’에 머물렀다. 다만 ‘함께 모이자’(Stay Together)에서 ‘함께 성장하자’(Grow Together)로 강조점이 변화되었다. 1분과는 교회일치를 다루었다. 2분과는 ‘하나님의 선교’를 다루었다. 3분과는 ‘책임사회’ 개념을 발전시켰다. 토론자들은 책임사회에 대해 “책임 있는 사회‧정치적 대안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평가하는 기준이며 우리가 선택할 사항에 대해 안내해주는 지침이다”라고 규정했다.

  4분과는 최초로 제3세계의 경제적 저개발지역 문제를 다루었다. 5분과는 종교자유와 인종평등 문제를 다루었으며, 에반스톤 총회는 인종평등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3개의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이 WCC를 탈퇴했다. 6분과는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 사이를 연결하는 선교적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평신도 신학을 강조했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김현정(에큐메니칼측), 명신홍(NAE), 유호준(교회협 총무) 목사가 참석했다. 특히 장로교에서 파송된 김현정, 명신홍 목사는 교단 총회에서 WCC 총회와 관련해 서로 엇갈린 보고를 해 교단 분열의 단초가 됐다.

 

서구권 밖 최초의 WCC 총회

제3차 뉴델리 총회(1954) :  제3세계 인도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빛’

  1960년대는 아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던 시기였다. 국제무대에서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초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가 결성되기도 했다. WCC는 서구권 밖 최초의 총회로 인도를 선택했다.

  제3차 총회는 197개 회원교회에서 557명의 대표가 참가했으며, 2회 총회보다 24개의 회원교회가 늘었다. 4개의 동방정교회(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18개의 신생교회(11개의 아프리카 교회, 5개의 아시아 교회, 2개의 남미 교회), 2개의 오순절 교회가 새로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1955년에 나토에 대응하는 동구권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결성됐다. 세계가 미소 양대 블록으로 재편되면서 아시아‧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반둥비동맹회의’를 결성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56년 스탈린은 헝가리의 자유혁명을 진압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강점했다. 1957년 가나가 영국연방에서 독립했다. 1959년에는 쿠바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했다. 1960년 남아공 정부가 샤퍼빌에서 흑인들을 대량 학살했고, WCC의 인종차별반대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WCC는 1955년부터 10년 동안 일어난 이스탄불 내전의 피해 복구를 지원했다. 또 소련의 헝가리 침공 때에는 난민들의 이주 정착을 도왔다. 1958년에 WCC와 러시아 정교회 사이에 대화와 방문이 활성화 되었다. 이러한 봉사와 대화는 4개의 동방정교회가 WCC에 가입하는데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한편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여 1957년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 CCA의 전신)가 조직되었다. 1958년 가나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는 WCC와 IMC의 통합을 결의했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교회들이 양 기구의 통합을 강하게 요구했다. 피선교지 교회들의 선교의식 성장, 양쪽의 회원권과 사업의 중복, 선교기구들과 교회 사이의 분립은 서구교회 안에서 생겨난 문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960년 WCC 중앙위원회는 WCC헌장을 개정했다. 개정 헌장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성서적이고, 복음적이고, 삼위일체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부름 받은 사명을 공동으로 완수하려는 교회들의 친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빛’ 뉴델리 총회의 주제는 신앙고백과 아시아를 함께 고려하여 결정되었다. 뉴델리 총회에서는 WCC헌장의 확대수정, IMC와 WCC의 통합, 동방정교회의 가입, 여러 아프리카 아시아 교회들의 가입, 로마 가톨릭교회의 업서버 참석, 타종교인들과 대화의 길 개방 등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것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개념이 필요했고 ‘세상의 빛’이라는 개념이 선택되었다. 에반스톤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사용했으나 뉴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한 것은 당시에 WCC를 향해 ‘신학적 상대주의’ 혹은 ‘혼합주의’라는 비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주제는 ‘나는 세상의 빛’(요8:12)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너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는 요청을 암묵적으로 담고 있었다. 예수님의 빛은 십자가라는 고난과 수치에 가려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교회도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증언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2차 WCC 총회는 ‘비교교회론’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뉴델리 총회는 최초로 ‘가시적 교회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총회는 교회일치의 목적이 ‘각처에 있는 모든’(all in each place)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visible unity)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풀뿌리 에큐메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제1분과에서는 최초로 종교간 대화를 강조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계신 적이 없다”는 포용주의 입장을 채택하면서도 혼합주의를 피하려고 경계했다. 제2분과는 신생교회의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직면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인류애와 신앙적 실천은 구분했다. 그리고 어떤 체제 안에서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에 복종할 수 있다고 하여 이념과 신앙을 구분했다.

 

제4차 웁살라 총회(1968) : “교회가 사회-경제정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아시아를 거친 WCC 총회는 다시 유럽으로 선회했다. 4차 웁살라 총회는 WCC 역대 총회 가운데 가장 사회 참여의 목소리가 높았던 대회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선교와 신학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좌파대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세계교회는 ‘하나님의 선교’가 강조되어 교회의 사회 참여는 첨예화되었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사회학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을 정당하거나 가능한 것으로 보고, 비폭력적 혁명을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 같은 주장은 해방신학이 탄생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WCC가 창립될 때 한 축을 담당했던 ‘생활과 사업’은 1925년 스웨덴에서 조직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도자는 스웨덴의 루터교 대주교 죄더블럼이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 이어 두 번째 유럽에서 열리는 WCC 총회는 스웨덴 웁살라로 결정되었다. 이 총회에 235개 회원교회로부터 704명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뉴델리 총회보다 38개의 회원교화가 더 참여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다른 정교회들이 가입했다. 이때는 WCC의 창립지도력이 물러나고 세대교체가 일어났으며, 제2대 사무총장은 미국 출신 유진 블레이크였다. 미 장로교 선교부 소속이었던 유진 플레이크는 마틴 루터킹과 절친한 친구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0년대는 세계사적 혼란기였다. 과학의 발전은 핵무기 경쟁을 가져왔으며, 충격적인 케네디 암살(1963)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1968)이 일어났다. 1965년 월남전이 시작되었고 1967년 중동에는 6일 전쟁이 일어났다. 1968년 체코의 민주화는 소련 군대의 학살로 막을 내렸다. 혁명의 열기도 높았다. 1963년 미국에서는 20만 명의 흑인들이 인권시위를 했고 1968년 전 유럽에서는 학생들의 반전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5)를 열어 교회개혁을 단행했고 메델린 주교회의(1968)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정치적 선택을 하였다. 1963년 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대회는 동방교회가 참여했고, 1965년도에는 로마가톨릭교회 대표가 ‘신앙과 직제’안에 있는 ‘연합연구위원회’에 참여했다. 1963년 멕시코의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는 개교회의 선교구조를 다루었는데 선교영역은 6대륙 모두이며 서구와 비서구 모두의 책임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1966년 ‘생활과 사업’은 ‘교회와 사회에 관한 세계대회’(제네바)를 열고 경제정의와 개발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4차 웁살라 총회 주제는 요한계시록 21장 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Behold, I make all things new)였다. 최초로 요한계시록 성경구절을 주제로 접근한 것이다.

  당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 안건은 사회정의와 경제정의 문제였다. 혁명적 시기에 개최되는 총회를 준비하면서 WCC 지도부는 기독론을 넘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주제로 삼았다. 주제로 인용된 성경구절은 역사의 최종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순간을 미리 보여주는 의미가 있었다.

  이 주제는 WCC가 ‘교회일치’와 ‘선교’보다도 ‘세상’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시기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급진적으로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나님의 관심이 ‘만물’에 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가져왔던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이며 이곳에 교회가 함께 일하도록 요청받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선교 신학이 강하게 표현되었다. 주제 안에서 새로움(new)은 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뉴델리 총회가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면 웁살라 총회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연결시켰다. 교회 에큐메니즘을 인류 에큐메니즘의 중심에 놓고, 교회일치를 인류일치를 위한 종말론적 징표로 이해했다.

 

 

 

제5차 나이로비 총회(1975) : “정의롭고 평화로운 지속가능한 사회” 

  WCC 5차 총회는 식민지 착취의 땅 아프리카로 향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신다’(Jesus Christ Frees and Unites)를 주제로 열린 제5차 총회는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총 285개 회원교회에서 676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제3세계는 자유와 해방의 몸부림이 거셌다. 1969년에 리비아는 카다피가 집권했다. 1971년에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면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1972년 필리핀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1973년에 미국은 칠레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켰다.

  1974년에 포르투갈은 스피놀자가 집권한 후, 앙골라, 모잠비크, 기네비소, 쌍토메프린시페, 까보베르데를 독립시켰다. 1975년에 크메르 루즈는 캄푸치아를 장악하고 3백만 명의 국민을 살해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점령했고, 유럽에서는 헬싱키 협정으로 냉전이 종식되었고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1939~1975)가 종식됐다.

  남미에는 ‘피억업자를 위한 교육학’과 ‘종속이론’이 등장했다. 또한 ‘실천-반성’의 방법론에 근거한 해방신학, 민중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들이 나타났다. 인종차별주의와 다국적기업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다.

  WCC 총회가 열릴 당시 아프리카는 백인정권에 의해 시행된 인종차별정책이 남아있는 대륙이었다. 또 아프리카 교회들은 지도력과 재정적인 면에서 여전히 서구교회로부터 자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1년 동아프리카 장로교회 존 가투 총무는 선교 모라토리움을 제안했다. 당시 WCC 사무총장은 도미니카 출신 필립 포터였다.

  웁살라 총회 이후 WCC는 사회참여를 강화하기 위한 기구개편을 단행했다.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교회개발참여위원회 △그리스도교의료선교위원회 △교육위원회 △살아 있는 신앙 및 이데올로기와의 대화 등의 조직이 신설됐다. 1971년 기독교교육세계협의회는 WCC에 통합돼 의식화 교육 프로그램과 행동신학 연구를 지원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WCC가 사회참여로 경사되는 불균형을 우려했고 복음주의권의 그리스도인들은 WCC의 방향을 비난했다.

  1973년 방콕에서 열린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는 ‘오늘의 구원’을 발표했다. 방콕대회에서 아시아 교회들은 존 가투가 제안한 선교 모라토리움을 강력하게 지원했으나, 나이로비 WCC 총회는 모라토리움을 수용하는 대신 ‘선교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켰다.

  나이로비 총회 주제는 종말론에서 기독론으로 돌아왔다. 사회참여를 지속하면서도 해방과 진보의 슬로건에 가려있었던 선교와 일치의 주제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에큐메니칼 운동의 딜레마는 예수를 해방자(frees)로 고백하면서, 동시에 화해자(unites)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성경적 자유 개념은 바울 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 죄, 율법, 죽음으로부터 자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 전체의 운명을 극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이기 때문에 인류와 함께 연대해야 하는 정치성을 포함하게 된다.

  총회 주제가 ‘하나 되게 하신다’는 표현을 담은 것은 WCC의 신학적 방향이 웁살라 총회의 사회참여적 성격에서 통전적인 방향으로 교정된 것을 나타냈다. 또한 동방정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나고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 교회의 참여도 늘어난 것을 반영하고 있다.

  1~2차 총회는 비교교회론, 3~4차 총회는 가시적 교회론을 나타냈다. 그러나 나이로비 총회의 교회론은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그 결과 개 교회들이 성만찬의 교제를 통해 가시적 일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협의회적 친교’를 주장하게 되었다. ‘협의회적 친교’란 개 교회들이 각자가 지닌 독특한 은사를 지키면서도 보편교회를 나타내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특수성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나이로비 총회는 에큐메니즘을 전교회가 전세계와 전인격에 전복음을 전하는 운동으로 정의했는데, 이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진정한 통전적인 에큐메니즘으로 확대된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이었다.

  제1분과는 영성을 사회참여와 연결시켜 이해했다. 2분과에서는 교회일치의 조건은 △공통의 목표 △동료의식 △공동의 상황인식이라고 확인했다. 3분과에서는 참된 공동체를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대화를 강조했다. 나이로비 총회는 최초로 타종교인들을 초청했다. 4분과는 인간해방의 우선 과제를 △인권 △성차별 △인종차별 문제라고 보았다.

  당시 전 세계는 생태계 파괴와 자원고갈 문제를 놓고 서구권 국가들과 개발도상 국가들이 대립했다. 5분과는 이러한 갈등에 대한 응답으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제6차 벤쿠버 총회(1983) : “생명을 죽이는 세력에 대응하라” 

  총회는 유럽에서 두 차례 열린 후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를 거쳤다. 그리고 다시 북미 캐나다로 넘어왔다. 제6차 총회는 요한복음 11:25, 14:6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Jesus Christ-the Life of the World)을 주제로 1983년 7월 24일부터 8월 10일까지 케나다 벤쿠버에서 301개 회원교회 847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벤쿠버 총회는 총대 구성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성 30%, 청년 15%, 평신도 46%로 비중이 높아졌다. 또 남반구 교회들의 참여가 크게 증가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까지도 세계는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77년 파키스탄은 민주 정권이 군사쿠데타로 전복됐다. 1979년 이란도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반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니카라과는 독재자 소모사가 추방되었으며,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1980년 살바도르 독재정권은 로메로 주교를 암살하는 등 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군사독재에 의해 고통 받았다.

  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는 백인독재 정권으로부터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WCC는 짐바브웨 해방 전선을 지원했다. 1980년 5월 한국에서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시민이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1982년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1977년 WCC는 종교간 ‘대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했다. 1980년에 멜버른에서 개최된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는 가난한 사람들이 현대 선교에서 더 소외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선교의 대상이면서도 하나님 선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WCC ‘교회와 사회위원회’는 1979년 MIT 공과대학에서 모여 과학기술 노하우 독점문제, 지속가능한 대체 에너지, 유전공학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벌였다.

  1982년 리마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BEM문서(세례, 성만찬, 직제에 관한)와 리마예배서를 만들었다. 이 모임에서 현대 신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판넨베르크는 WCC가 웁살라 총회 이후 ‘신앙과 직제’를 약화시키면서 사회정의와 교회일치를 연결시키는 경향성을 반대했다. 1982년 WCC 중앙위원회는 ‘에큐메니칼 확언’을 채택했다. 선교에 대한 이 선언은 현재까지도 WCC의 선교와 전도에 관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벤쿠버 총회는 주제를 통해 ‘생명’을 강조했다.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적 억압, 경제적 착취, 군사주의, 인권유린, 핵무기 개발 등 생명을 죽이는 모든 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구절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특히 기독론은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초대교회 이후로 성육신 기독론과 십자가 기독론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다. WCC 안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전통이 강조해온 ‘아래로부터의 기독론’과 동방정교회의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왔다. WCC 총회 주제들에 나타난 기독론은 이 두 차원을 상호 관련시키고 있다.

  콘라드 라이저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생명’이라는 뜻은 또한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세상의 창조주가 되신다. 그래서 이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세상의 주인으로 아는 사람들의 고백이 된다.

  1~2차 총회는 교회분열 문제에 직면했고, 3~4차 총회는 일치의 목표를 설명했다. 5~6차 총회는 가시적 일치를 향한 실천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하게 강조했다. 밴쿠버 총회는 ‘BEM문서’를 교회일치의 방법으로 사용하면서 ‘가시적 성례적 친교’를 교회일치와 인류공동체에 대한 성례적 비전을 열어주는 징표로 사용했다. 교회란 회복될 인류공동체의 표징이고 인류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도구라 역설했다.

 

제7차 캔버라 총회(1991) : 한국 여신학자 ‘혼합주의’ 논쟁 불 지펴

  1991년 개최된 제7차 호주 캔버라 총회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주제 강연으로 초청 받은 정현경 당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는 종이를 불태우며 초혼제를 열었다. 정 교수의 초혼제는 WCC의 신학적 자유주의, 종교 혼합주의 논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지금까지 WCC 총회가 열리지 않았던 대륙은 오세아니아뿐이었다. 환경 문제, 원주민 문제, 영성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호주의 캔버라가 선정되었다. 이 총회에는 317개 회원 교회로부터 889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1980년대 말부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구권 교회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에 나미비아가 남아공에서 독립을 이루어 아프리카의 마지막 식민 통치가 끝났다. 남미의 많은 국가들은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념, 인종을 둘러싼 전쟁은 계속됐다. 구 소련과 발칸반도 안에서 인종 학살이 일어났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페루 등지에서는 내전이 벌어졌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았다. 페르시아에서는 걸프 전쟁이 일어났다.

  광범위한 환경오염,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의 사막화 확대는 인류의 생존권에 대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강대국들의 핵실험장이 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사회적인 대안 모델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

  이 기간 WCC는 중국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캔버라 총회는 중국 교회의 회원권을 회복했다. 또한 WCC는 한국 교회의 통일 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WCC는 1984년에 도잔소 회의를 개최했고, 이듬해 제네바 글리온에서 남북기독자 성찬 교류를 추진했다. 북한교회 대표자들은 캔버라 총회에 초대를 받았다. 1988년에 WCC는 ‘여성과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10년 운동’을 지원했다. 1989년에 산 안토니오에서 개최된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 대회에서는 ‘포용주의 구원론’을 받아들였고, 1990년에 서울 JPIC 대회가 열렸다.

  총회 주제는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Come, Holy Spirit-Renew the Whole Creation)였다. WCC 총회 중 최초로 성령론이 주제로 채택된 것이다. 또 주제는 신앙고백이 아닌 기도형식을 사용했다. 총회 개막 연설에서 사무총장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가지 우선 안건을 제시했다.

  “첫째, 교회는 성령이 모든 영성과 종교들 안에서 활동하는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배타적으로 활동하는지 답해야 한다. 둘째, 사회주의가 붕괴했기 때문에, 교회는 대안적 사회 모델을 찾아야 한다. 셋째, 다양한 교파들 간의 가시적 일치가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총회는 또 환경문제와 생명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나타냈다. 환경문제와 창조신학을 연결시켰고, 경제와 생태계에 대한 윤리가 교회의 삶 속에서 성찰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호주 원주민들의 땅에 대한 영성이 이러한 주제를 논의하는데 매개체가 되었다.

  캔버라 총회는 리마 예식서에 근거해서 4,000명 이상의 다양한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BEM 문서가 추구하는 일치를 예배로 표현한 것이다. 총회는 코이노니아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향후 WCC 교회론은 선교, 봉사, 일치가 교회론 안에서 통합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캔버라 총회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성령론의 범위와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해 뜨거운 신학논쟁이 일어났다. 정현경 교수의 퍼포먼스는 이 같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초혼제를 통해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죽어간 사람들, 중세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여성들, 일본 정신대에 끌러가 죽은 한국 여성 등을 호명했다. 이후 호주의 원주민과 한국의 농악단이 굿을 벌였다. 동양의 토착문화와 기독교의 조화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정 교수의 발표와 퍼포먼스는 성령의 활동이 기독론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과 동방정교회의 대표들은 그 입장을 종교 혼합주의 위협이 있다고 비판했다. 캔버라의 최종적인 결론은 “영들은 분별되어야 한다. 모든 영이 성령은 아니다. 성령을 분별하는 주요 기준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언한다”고 했다.

  또한 총회의 토론 문서는 생태계 안에서 인간중심성과 청지기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라고 비판했으나, 최종 선언문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고, 환경을 지키는 청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지지했다.

 

 

 

제8차 하라레 총회(1998) : ‘희년’ 맞아 경제와 폭력에 대항 

  세계 교회 대표들이 모여 함께하자고 선포한 후 정확히 50년만이다. 그래서 WCC 제8차 총회를 ‘희년 총회’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회복과 치유의 의미를 가진 ‘희년’을 맞은 WCC는 총회 장소를 아프리카 하라레로 결정했다. 아프리카는 기독교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지만, 가난과 인종갈등, 에이즈 등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땅이었다. 세계 어느 곳보다 희년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특히 총회가 열린 짐바브웨는 1980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됐으며, 당시 WCC가 짐바브웨 애국전선을 지원하면서 큰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1994년에는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아프리카의 중요성이 고조되기도 했다.

  당시 세계는 동구권 해체 이후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가 흥왕했다. 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발흥하기 시작했고 빈부차이도 심화됐다. 이 시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은 대규모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제적으로 이식되면서 미국식 경제가 세계의 흐름을 지배했다. 경제 위기로 인해 유럽은 보수화됐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과 재정도 큰 위기를 맞았다. 1990년 이후 지구 온난화와 엘니뇨 현상이 세계적인 기상 이변을 일으켰고, 자원 고갈과 인구 증가가 또 다른 위기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교토협약이 체결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각국의 노력이 시작됐다. 또 1994년 르완다는 내전으로 경악스러운 인종 청소가 자행됐다. 하지만 국제 사회는 이를 묵인했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소망 중에 기뻐하자(Turn to God, Rejoice in Hope)’라는 주제로 개최된 하라레 총회는 332개 회원교회 960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특히 4,5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대규모 예배를 드렸다. 당시 총회 준비를 맡은 사람은 제5대 사무총장 콘라드 라이저 박사(Konrad Raiser, 독일)였다.

  하라레 총회 주제는 기독론, 성령론에 이어 삼위일체론으로 확대됐다. 이 주제는 희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회개와 갱신을 강조했다. 특히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소망 중에 기뻐하자”는 말을 인용하며 고통 당하고 있는 세계를 위로했다. 콘라드 라이저 사무총장은 총회 주제를 언급하면서 “철저한 회개 및 방향전환과 자기평가,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화해와 일치로 초대, 21세기의 전야에서 희망의 공동체가 되라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브라질 여성신학자 데이펠트(Wanda Deifelt)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인간성으로 돌아가서 우리 시대의 특징인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코수케 고야마는 탕자를 끌어안는 아버지, 홈리스 예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기 위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희망은 시간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라고 말했다.

  8차 총회는 세계 각국에서 자행된 폭력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2000년부터 2010년까지를 ‘폭력극복을 위한 10년’(Decade to Overcome Violence)이라고 선언했다. 또 제3세계의 가난한 국가들 특히 아프리카에 대해 ‘부채탕감운동’을 전개하자고 선언했다.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공청회식 회무진행(Hearing)을 도입했고, 에큐메니칼 공간을 확대하는 의미로 ‘파다레’(열린마당)을 열어 놓았다.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반적인 이해와 비전이라는 제목의 CUV(A Common Understanding and Vision of the Ecumenical Movement)문서를 채택했는데, 이 문서는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 ‘기독교포럼’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CUV는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연대의 오이쿠메네를 위해서 다양성 속에서 일치성을 추구하는 대안적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총회는 글로벌화 공동체에 대한 ‘대안 공동체’ 추구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경제, 문화적인 글로벌화의 일방적인 지배에 항거할 것을 말한다. 특히 1997년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열린 WARC 23차 세계대회가 선언 했던 ‘경제 부정의와 생태학적인 파괴에 관한 인식과 교육과 신앙고백의 헌신된 과정’을 환영하고 WCC도 이에 동참할 것을 표명했다. 초국적(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대한 대안으로 ‘효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의 창안’을 추천했다.

 

제9차 포르토알레그레 총회(2006) : 대안세계화, 경제정의 위한 ‘아가페 과정’ 제시 

  희년을 맞아 아프리카를 거친 WCC는 다시 대륙을 건너 아메리카로 넘어왔다.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열린 최초의 총회였다. 2006년 2월 WCC는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라는 주제로 총회를 개최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의 영향으로 인해 빈부격차로 인한 남북문제가 심각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사회주의 동구권의 잇따른 경제 몰락으로 인해 혁명적 분위기는 점차 누그러졌다. 하지만 칼 막스가 지적했던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세계는 부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가난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한 탈레반의 테러 사건이 자행되면서 전 세계는 또다시 큰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미국은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003년에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과 맞서 독재 정권을 붕괴시켰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가 더욱 공고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으며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한 자살 폭탄테러가 서구권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됐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2004년에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밀어닥친 최악의 쓰나미로 인해 2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5년 8월에는 카타리나 태풍으로 인해 미국의 뉴올리앙스에서 1만 명이 희생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식민지 착취와 군사독재를 경험한 남미의 중심국 브라질에서 총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당시 남미는 좌파 및 중도 좌파 정권이 집권하면서 오랜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해쓰고 있었다. 특히 브라질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는 등 반세계화, 대안세계화와 관련한 논의를 활발하게 펼쳤다.

  WCC는 총회를 통해 남미에서 사회참여 전통을 가지고 급성장했던 오순절 교회들과 친교를 확대했다. 특히 9차 총회에는 348개 회원교회에서 691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총회 준비는 케냐 감리교회 출신인 새뮤얼 코비아(Samuel Kobia, 2004-2009)가 맡아서 진행했다.

  하라레 총회 이후 WCC 선교신학은 △복음과 문화 △세속주의 안에서 증언 △건강과 치유라는 세 측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오늘의 일치 안에서 선교와 전도’(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 2000)를 발표했다. 또 정교회 참여활성화를 위한 특별위원회는 ‘합의결정제’(consensus decision-making)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방식은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에서부터 사용되었다.

  합의결정제와 관련해 새뮤얼 코비아 총무는 “총회의 주요 성명들과 활동들에 대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합의모델’의 여정을 처음으로 시작했다”며 “21세기 에큐메니즘에 대한 지난 수년간의 토론은 공동의 멤버십 보다는 우리의 공유된 임무가 미래를 보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세계평화를 위한 타종교와의 대화 프로그램이 지속되었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전에 대해 ‘아가페 과정’(AGAPE Process, 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 and earth)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즉 가난한 민중과 생태계를 끌어안은 대안지구화를 제안한 것이다. WCC는 특별히 아프리카의 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HIV/AIDS 극복을 지원하고, 아프리카 어린이의 권리를 강조했다.

  총회 주제인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는 하라레 총회에 이어 기도형식을 사용했다. 또한 하나님을 주어로 삼았다. 주제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기독론적 주제에서 사용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대칭 구조가 여기서는 하나님과 세상의 대칭구조로 변화된 것이다. 특히 ‘은혜’라는 표현은 타자를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신학적 핵심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WCC의 3대 구성 요소인 개신교회, 동방교회, 오순절 교회의 신학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표현이었다.

  또 경제정의를 향한 기독교인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그 역할을 조명했다. 폭력극복을 위한 증인의 역할, 종교다원 상황에 직면한 도전과 문제들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인의 연대와 협력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한국에서는 예장 통합, 기장, 감리교, 성공회가 회원교단으로 참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에큐메니칼 기관단체 관계자들도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제10차 부산총회(2013.10.30) : ‘정의와 평화’ 의제

  세계교회협의회 10차 부산총회는 1961년 인도 뉴델리 총회 이후 42년 만에 열리는 아시아 대륙 총회다. 유럽의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아시아는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특히 지난 수십년간 중국과 한국(일본을 제외한)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눈에 띄게 성장했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기독교가 갖는 독특한 위치 또한 세계 교회가 주목한 지점이었다.

  한국이 WCC 10차 총회 개최지로 선정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일치’와 관련되어 있다. WCC 한 책임자는 세계 교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초대장 안에는 ‘강한 협력의 느낌’(strong sence of togetherness)이 들어있었다는 말로 결정 배경을 소개했다. 바로 WCC 회원교회 외에 다양한 주체의 지도자들의 서명이 추가됐던 점이다. 중국교회와 일본교회의 지지는 물론, 가톨릭과 복음주의권, 오순절교회와 정교회에 이르기까지 동의를 얻어냈던 것이다.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인 점, 종교간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점 등도 부산총회 유치의 배경이 됐다.

  부산총회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로 우리를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한국에서 열리는 총회라는 점에서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평화 문제가 중점적인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부산총회 주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요청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의견은 부산총회의 주제가 생명의 중요성과 한국의 통일, 아시아의 정의와 평화 문제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는 이 같은 의견들을 모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생명, 평화, 치유”라는 주제를 WCC에 제안했다. 특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으로 인해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면서 ‘생명’과 ‘평화’ 의제가 WCC 중앙위원회 안에서 큰 설득력을 갖게 됐다.

  이와 함께 세계 교회에서는 ‘정의’와 관련한 문제를 이미 지나간 이슈처럼 받아들이거나,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로 간주했다. 또 세계 에큐메니칼의 전통적 주제인 ‘일치’ 문제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정의’ 문제가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필리핀 교회에서 강하게 제안한 정의 의제도 주제에 반영됐다. WCC는 한국 교회의 요청과 아시아 교회 전반의 의견을 수렴해 부산총회 주제를 최종 결정한 것이다.

  총회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은 이사야 42장 1절~4절로 결정됐다. 하나님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고”(3절),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른다”(4절)는 것이었다. ‘갈대’와 ‘등불’은 생명을 나타내고, ‘꺾지 아니하며’, ‘끄지 아니하고’는 평화를 나타내며, ‘공의’는 정의를 상징한다.

  이번 주제와 관련해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교회사)는 “9, 10차 총회에 이어 하나님에 중심을 두면서 교회의 선교과제가 생명, 정의와 평화인 것을 강조했다”며 “WCC 총회에서 정의와 평화가 주제로 채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WCC 총회 주제에서 생명이 처음 언급된 것은 6차 뱅쿠버 총회였다. 또 “아시아에서는 생명, 정의, 평화 문제가 교회의 일치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반증한다”며 “이 주제는 WCC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정의, 평화, 창조보전(JPIC)이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의제라는 점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세계 교회는 한국 교회를 향해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번 총회 주제를 결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공헌했다. 이 주제를 해석하고 교회의 삶에 깊이 반영하는 작업 역시 WCC 총회 준비와 함께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됐다.

WCC 부산총회 관련 논문집_WCC 개최, 세계화 계기인가 선교 모라토리움인가

선교행정연구소/선교 자료  2013-11-01 17:55:45


한국신학회 <한국교회, 미래는 있는가?- 2013 제10차 WCC 부산총회 그 이후> 논문집 발간 

  10월 30일 개막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신학회(이사장 조용목 목사, 회장 정상운 교수)가 논문집을 발간했다. 이 논문집은 지난 7일 성결대에서 한국신학회가 개최한 공동학술대회 발표 논문들과 특별기고들을 모은 것이다. 당시 학술대회에서는 논문발표 외에도 정상운 회장(성결대 전 총장)을 비롯해 오덕교 합동신대 전 총장, 이은규 안양대 총장, 조종남 서울신대 전 총장 등 복음주의 신학교들의 전·현직 총장들이 심포지움 토론자로 나서 관심을 끌었다.

  논문집에는 당시 주제발표였던

  -이종윤 박사(한국기독교학술원장)의 ‘한국교회, 미래는 있는가?- 2013 제10차 WCC 부산총회 그 이후’를 비롯,

  -이동주 박사(아신대 전 교수)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이광희 박사(평택대)의 ‘WCC 논쟁점으로 본 한국 교회성장 전망’,

  -박창영 박사(성결대)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성경적 근거’,

  -이은성 박사(성결대)의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교육의 당면과제’,

  -이상규 박사(고신대)의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한국교회의 타종교 이해’ 등이 담겼다.

  이와 함께 특별기고로 당시 좌담을 펼쳤던

  -조종남 박사(서울신대 전 총장)의 ‘로잔의 복음주의 선교신학’,

  -이동주 박사의 ‘로잔언약의 신학적 근거’,

  -이은선 박사(안양대)의 ‘WCC의 탄생과 역사’,

  -김태연 박사(한국로잔 총무)의 ‘2013 WCC 대회 이후, 한반도 화해의 선교 가능한가?’ 등이 배치됐다.

  논문집 발간을 주도하고 원고를 모은 정상운 한국신학회 회장은 발간사를 통해 “주지하시는 것처럼, 한국교회는 지나온 과거의 역사 속에서 WCC 신학 노선으로 인해 한 차례 극심한 열병을 앓게 됐고, 급기야는 교단이 분립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며 “지금 와서 돌아볼 때, WCC 단체 가입 유무를 놓고 교단이 분열할 정도로 당시 이 문제가 한국교회에 절실하지 않았음에도 갈등과 파국으로 치달아 형제가 서로 싸우고 분열되는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WCC에 대한 보수·진보의 시각차가 더욱 심화됐다.

  정상운 회장은 “이번에 개최되는 WCC 부산총회는 세계 110개국 349개 교단 약 7천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국제대회로, 한국교회는 이에 대해 찬반 입장이 크게 나뉘고 지나간 역사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이 양상과 내용은 다르지만 재현되면서 갈등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쪽에서는 한국교회가 WCC를 통해 세계 교회와 만나 선교의 문이 크게 열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의 계기가 될 것이라 예견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신앙의 일치보다 기구적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WCC의 근본 구조를 볼 때 한국교회에 득보다 실이 되리라며 우려하고 있다는 것. 이 상황에 대해 “분명한 것은 WCC가 반개종주의를 견지하고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요14:6, 행4:12)을 떠나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 뿐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쉽게 용인함으로 신앙의 혼란을 가져다 주고 선교의 필요성을 해지시킴으로써 한국교회로 하여금 전도의 문을 닫고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의 본래 사명을 상실하게 하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상운 회장은 “WCC가 2천년 교회 역사에서 발생된 분열의 벽을 헐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교제나 이 땅에서의 정의와 인권, 평화 등 ‘사회구원’에 대한 노력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고 오늘날 개인구원으로 고착된 한국교회가 배우고 반성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사회구원은 우선순위에 있어 개인구원 이후 결과와 과정으로 맺어야 할 믿음의 열매”라고 강조했다. 그는 “온전한 성화는 인간의 개인적 성화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성화로 나갈 때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난 사회구원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고, 로잔언약(1974년)에서도 강조했듯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두 가지 책무로써 사회봉사가 영혼구원의 복음전도를 우선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WCC에 대해서는 “예수님 말씀처럼 열매를 보면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마 7:15-21)”며 “1948년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부터 지난 9차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까지 매 총회 내용과 활동들을 보면, WCC의 반성서적 실체와 지향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WCC측은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적 종교혼합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상관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단적으로 1991년 7차 시드니 총회 당시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만 해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 “백 번 이해해 WCC와 상관 없는 강연이고 집행부와도 관계 없는 돌발 주장이었다면, 다음 총회 때 이 일에 대해 분명한 입장 발표를 통해 오해를 불식시켜야 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현경 교수의 특강은 한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WCC의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며 “1983년 6차 밴쿠버 총회에서도 캐나다 인디언들의 토템 제막식과 성령강림을 위한 무당의 강신굿이 이미 시행된 바 있다”고 했다.

  한국교회의 역할 전환에 대해서는 “구원받은 자로서 이 땅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철저히 반성하고, 과감히 가시적인 교회성장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내실을 기하여 성경적인 바른 역사의식과 바른 신앙·삶·성장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가시적 성장을 세계 교회에 드러내고 주도하려는 일보다는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 겸손히 마지막 때에 재림신앙으로 무장하고, 성결의 복음으로 거듭나 각자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본연의 사명인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이 다른 복음(any other gospel)으로 변질되거나 혼잡되어 전해지지 않고, 순복음(pure gospel)으로 바로 전파되며(갈 1:6-12), 다원화 시대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서 한국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왜 단기간에 양적으로 성장하게 하셨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분별하여,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뜻을 헤아려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조용목 이사장은 “대중영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와 성공주의 번영신학의 경향이 교회에 조수처럼 밀려들어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대중의 칭찬과 호응을 얻기 위해 복음을 혼잡하게 하고 있다”며 “이 책을 통해 정확한 나침반과 이정표가 제시됨으로써 한국교회가 바로 세워질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고 전했다.

 
2013.10.25 크리스찬투데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