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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이야기/믿음의 가문

믿음의 가문 History

by 임도마 2023. 5. 13.

믿음의 명가

가문훈
주만 섬기는 가정
여호수아 24:15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010년 8월 14-15일 가족 수련회

대구동노회 제173회 정기노회 촬요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31120() 15:48

노회장 임상명 장로

대구동노회는 지난 108일 대구칠곡교회(오세원 목사 시무)에서 목사 156명 장로 138명 계 294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73회 정기노회를 개최하고 노회장에 임상명 장로(노원교회)를 선출하는 등 임원을 개선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임원개선>

노회장 : 임상명(노원) <>오세원(대구칠곡) 양재연(차산) 서기 : 김병옥(한세영광) <>김재용(대구신서)

회록서기 : 김규진(팔달) <>안성희(하양열린) 회계 : 조황(대구) <>최준곤(대구신광)

대를 이어 대구동노회 노회장 지낸 '나눔 대장'

한국기독공보 표현모 기자.  20141104() 15:58

[피플] 대구동노회 직전노회장 임상명 장로

임 장로는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노회를 아름답게 이끌어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노회장으로 재임 중에는 재판국기소위원회가 한번도 안 열렸고전반적인 행정을 말끔하게 마무리해 놓고 신임 노회장에게 바통을 넘겼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장로는 노회 내에서 그 누구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섬기는데 앞장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임 장로는 국내 및 해외 선교지를 다수 후원하는 것을 비롯해 지역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해왔다.

지난 107일 성빈교회에서 개최된 대구동노회 175회 정기노회에서는 임상명 장로(노원교회)가 지난 1년 간 성심을 다해 헌신했던 노회장직을 내려놓았다.

임 장로는 신임노회장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기도했다.

"주님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없습니다. 큰 과오 없이 귀한 직분을 잘 마칠 수 있어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버지에 2대째 대구동노회에서 장로의 신분으로 노회장직을 감당하는 귀한 축복을 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임 장로의 아버지인 고 임영희 장로는 19886대 대구노회장에 선임되어 노회를 이끌었고25년 후인 2013년 임상명 장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회장에 추대됐다. 부자 장로가 같은 노회의 노회장을 지낸 것은 최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임 장로는 특히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미자립 목회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재정적 어려움으로 양복 한 벌 사 입기 어려운 미자립목회자들에게는 양복을 한 벌씩 선물하기도 했다.

임 장로의 이러한 섬김은 노회장이 되었다고 해서 특별히 행한 섬김이 아니었기에 더욱 귀하다. 30년 이상 이러한 섬김과 선교 지원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은 그의 봉사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임 장로는 이러한 섬김 또한 부친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고백한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분이셨습니다. 목회자 섬김에도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셨죠. 성주 양양의 시골교회에서 장로가 되셨는데 교역자를 모시기 위해 대구까지 나오시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보면서 자랐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크면 적어도 시골교회의 목사님은 내가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은 재산은 없어도 그때 그때 생길 때마다 은혜주신 줄 알고 여러 어려운 곳을 섬겨왔는데 다른 것은 못했어도 여기에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고백하는 임 장로는 노회장으로 재직하는 중 재정을 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본인의 지갑을 열었다. 이러한 솔선수범이 있자 노회의 사업들이 술술 잘 풀렸다고 한다. 노회 건물에 세들어 있던 업체들도 재임 중 모두 내보내고행정을 정비하는 일에도 많은 기여가 있었다.

임 장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여러 일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내 권춘자 권사의 기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임 장로는 아내가 남편이 하는 일을 묵묵히 잘 따라주고모든 일을 기도로 후원하는 최고의 소울 메이트라고 자랑했다.

()경북상사를 운영하며 40년간 사업체를 운영해오고 있는 임 장로는 "1원 있으면 1원 있는데로10원 있으면 10원 있는데로 힘 닿는데까지 섬기려고 노력했다. 모두 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라며 "이제 은퇴를 1년 정도 남겨놓고 있는데 앞으로도 힘이 닿는데까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고 또 섬기겠다"고 다짐을 피력했다.

한국일보 201787

2017 대한민국 혁신기업 대상 (주)엘로이즈

혼합 현실 아바타와 AI 기술의 융합으로, 혁신적인 아바타 기술 선보이며 업계 선도, 신개념 아바타를 디지털 콘텐츠 안에 적용.

스타트업 연구소기업인 ()엘로이즈(대표 임상철)가 혁신적인 아바타 기술을 선보이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월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이동·정보통신 산업 전시회인 MWC(Mobile World Congress) 2017에서 엘로이즈는 자체 개발한 MR(혼합현실) 아바타 기술을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 셀피 앱인 위드미를 선보였다. 차별화된 컨셉의 앱은 BBC를 위시한 20여개의 언론과 관람객들의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엘로이즈의 기술은 3D 센서가 장착된 폰이나 스캔 부스에서 인물을 스캔하고 Auto-Rigging 기술로 움직이는 아바타로 만들어 디지털 콘텐츠 안에 적용하는 기술이다. 위드미에 적용된 아바타는 나에게 인사도 건네고 하트 표현도 날리고, 내가 원하는 포즈로 셀카도 같이 찍을 수 있다.

엘로이즈의 아바타는 기존 폰에서 앱만 다운받으면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바타 생성은 3D 센서와 구글의 Tango 기술을 적용한 탱고폰에서 가능합니다. 애플에서도 3D 센서와 AR 기술이 적용된 아이폰8이 나온다고 하니 아바타 생성이 보편화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3D 센서가 적용된 아이폰이 출시되면, 탱고폰의 확산과 더불어 자신의 폰으로 아바타를 손쉽게 생성하여 즐기는 문화가 보편화 될 것이라는 임 대표의 설명이다.

“AI가 이슈가 되면서 AI 스피커가 앞다투어 출시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마존의 ‘Echo Show’, 네이버와 라인의 ‘Face’처럼 디스플레이가 탑재된 제품도 개발 되고 있습니다. 이런 AI 제품에 엘로이즈의 MR 아바타를 적용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향후 AI 로봇과 결합하면 공항, 박물관, 전시관, 호텔, 건물 로비 등의 컨시어지 서비스에도 일대 혁신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임 대표는 오는 9월 세계 3대 게임쇼로 유명한 도쿄게임쇼 2017에서 70인치 대형 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으로 ‘AI Avatar Concierge’를 선보일 계획이다. AI 스피커형 제품의 차세대 버전으로, AI 음성 비서에 실사 아바타를 자연스럽게 융합한 서비스다.

또한, 엘로이즈는 단시간 내에 자신의 아바타를 생성하는 자동화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회에서 자체 개발한 스캔봇(자동화 스캔 장비), VAW(Vivid Avatar World) 플랫폼과 서비스(커플 댄스, 게임, 교육용 콘텐츠 등) 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임 대표는 “4차 산업혁명의 혁신적인 변화속에서 VR, AR 및 혼합현실 환경과 AI와의 융합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향후 연예기획사와 연계하여 스타 아바타를 통해 글로벌한 K-Culture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직업정보 리셋] 전문가에게 듣는다(5)

AI에 형상을 부여한다 '아바타 산업의 부활'

임상철 엘로이즈 대표이사 /송병형 기자

기술혁신이 산업과 직업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한국의 한 스타트업이 내놓은 혁신적인 아바타 기술은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는 아바타 산업에 부활의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메트로신문은 지난달 열린 2017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 세계 최대 규모의 이동·정보통신산업 전시회)에서 새로운 모바일 아바타 엔진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엘로이즈의 임상철(54) 대표를 최근 만나 그가 생각하는 아바타 산업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임 대표는 스타트업의 창업자라고 단순히 소개하기에는 사실 어폐가 있다. 삼성그룹에서 이건희 회장의 기술경영인재 비전을 직접 실행에 옮긴 주역이자 스타트업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 분야의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베테랑도 3년 전 아바타 산업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 차가운 시장의 반응에 고전해야 했다. 고가의 3D 애니메이션에 집중했던 기존 아바타 업체 중 성공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아바타 기술'이라는 말만 나오면 학을 떼는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임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바타 기술이 AI(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봐다. 겉으로 드러난 실체가 없어 막연하기만 한 AI 등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성비서 수준의 AI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존 아바타 산업의 문제점을 해결하면 가능하다고 봤다. 엘로이즈의 아바타 엔진은 수십억 원이 들어가는 아바타 구현기술을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사람들의 일상에 가장 가까운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그 일부인 '위드미' 앱이 이번 MWC에서 세계 유력언론들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엘로이즈의 아바타 기술은 어떤 것인가?

"믹스드 리얼리티 아바타 엔진, 줄여서 MRA엔진이다. 저희가 만든 용어다. 인체를 스캐닝 해서 아바타를 생성한 뒤 오토리깅으로 아바타에 생명을 부여한다. 오토리깅은 쉽게 말하면 아바타의 뼈대나 각 관절을 움직이게 만드는 기술이다. 얼마나 오토리깅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아바타 움직임의 유연성이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아이돌의 춤이라든가 액션을 애니메이션화를 해 오토리깅된 아바타에 적용하면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의 움직임을 하게 된다. 춤을 추기도 하고 게임속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말도 하게 된다. 우리의 MRA엔진은 이런 전 과정을 한 번에 구현한다."

  -기존의 아바타 기술과는 어떻게 다른가?

"기존의 기술은 많게는 수십억 원, 적게는 수억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3D작업을 위해 수백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촬영된 이미지를 캡처해서 수작업을 통해 아바타를 생성하는데 수일에서 수주가 소요된다. 영화 속 아바타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움직였다. 기존의 아바타 산업은 모두 여기에 집중했다. 우리는 비전문가도 누구나 쉽게 5분 정도면 아바타를 만들어 낼 수 있게 하자는 생각으로 엔진 개발을 시작했다. 가볍게 빨리 움직이는 엔진이다. 우리 엔진을 사용하면 자기가 원하는 아바타를 만들어서, 이모티콘에 적용시키거나 게임속에 쇼핑몰에 들어가 볼 수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아바타 엔진에 맞는 스마트폰이 나온다면 앱을 다운로드 받는데 드는 비용이 전부일 거다."

  -기존 아바타 산업과 시장이 다른 이유는?

"3D애니메이션에 집중했던 기존 아바타 산업은 비용과 시간에서 문제가 있다보니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아바타 기술이라고 하면 아예 학을 뗀다. 엘로이즈가 엔진을 개발한지 3년이 좀 넘었는데 2년 반 전까지만해도 선입견 때문에 시장에서 외면을 당했다. 우리의 아바타 기술이 무엇인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이슈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바이오, 드론, AI, MR(혼합현실),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등의 개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기술들은 가시적인 형태가 없다. 바로 여기서 가능성을 봤다. 아바타가 이런 기술들에 가시적인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비용, 오랜 시간 등 기존 아바타 기술의 문제들도 해결했다. 엘로이즈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혼합현실 공간에서 사람의 자기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고 재미를 주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신개념 아바타 문화를 창출하는 기업을 지향한다. 저는 혼합현실 시대가 온다고 본다."

  -구체적인 진출 분야를 생각해봤나?

"두 가지 분야다. 우선 AI 분야다. 3월부터 전세계적으로 AI가 상용화를 시작한다. 새로 나올 스마트폰들도 기존 스마트폰의 AI보다 더 사용자 친화적이고 상호작용이 가능한 비서형 AI를 탑재한다. 우리는 그 AI에 형상을 부여하고자 한다. 스마트폰 메이커가 원하는 유명인의 아바타 또는 사용자 각각이 원하는 인물의 아바타를 폰에 넣어주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폰에서 자신의 이상형이나 사랑하는 가족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제 경우는 딸의 아바타와 대화하고 싶다. 3D폰이 나오면 우리 엔진만 넣으면 이런 일들이 현실이 된다. 다른 하나는 쇼핑몰 분야다. 요즘 모델하우스에서 VR를 활용하는데 우리는 아바타를 등장시켜 고객과 대화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MWC에서 선보였던 위드미 앱도 이렇게 대화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중이다."

  -위드미 앱은 해외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는데?

"MWC의 핵심은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기기다. 그런데 사실 폰은 관객을 끌만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니 VR이니 AR이니 하는 것을 내보여서 방문객들의 관심을 끌고, 이어서 메인인 폰을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던 BBC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위드미 앱에서 아바타를 만들어 놓기만 하면 세상을 떠난 가족과도 함께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언론의 관심을 받은 것 같다. 특히 우리의 아바타는 열린 구조다. 제작업체가 제공하는 아바타만 쓸 수 있는 기존의 막힌 구조와는 달리 내가 만들어서 내가 웹서비스에 올린다. 우리는 이런 장점을 활용해 유튜브와 같은 서비스도 론칭하려고 한다. 이런 열린 구조가 언론을 놀라게 한 것 같다."

임상철 대표는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82학번)를 나와 삼성에서 핸드폰 연구개발, 그룹 전체 경영진단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구조조정본부에 있을 때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5%의 핵심인재를 만들기 위한 기술경영인재(기술인력에게 MBA과정 제공) 프로젝트를 맡아 추진했다. 본인부터 카이스트와 카네기멜론에서 경영을 공부했다. 이로 인해 경영에 눈을 뜨게 됐고, 2003년 삼성을 나와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이후 10 년 동안 큰 성공과 실패를 반복, 성패를 떠나 기독교 신자답게 진실한 사업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2013년 엘로이즈를 창업했다. 엘로이즈는 '하나님이 살펴보고 계신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다.

 

'금탑산업훈장 수상.. "패널 부품 발전기여"

기사입력 : 20201207[서울 = 뉴스핌] 박영암 기자

이창원 거림테크 대표, 금탑산업훈장 수상

플라스틱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용 광학필름 부품(Back Plate) 국산화에 성공한 거림테크 이창원 대표가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중소기업 융합촉진에 기여한 개인과 법인에 대한 포상 수상식이 수여식이 열렸다.

7일 중소벤처기업부(장관 박영선)에 따르면 대전 호텔 아이씨씨(ICC)에서 이업종 교류와 협력문화 확산에 기여한 유공자를 포상하는 중소기업 융합촉진 유공자 포상 수여식이 개최됐다.

이날 수여식에서 거림테크() 이창원 대표가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이 대표는 중소기업 간 기술융합으로 플라스틱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용 광학필름 부품(Back Plate)의 국산화에 성공하는 등 패널 부품산업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1년 대구에서 설립된 거림테크는 중국과 베트남 등에 해외법인을 두고 있다. 지난해 932억원의 매출액과 75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연결손익계산서 기준).

pya8401@newspim.com

 

믿음의 가문에 영향을 준 부해리 선교사

브루엔(Henry Munro Bruen) 선교사의 한국생활 40년

대구·경북지역의 선교역사를 알려주는 책이다. 원제 ‘40 years in Korea',
클라라 브루엔(Clara Hedberg Bruen) 여사가 남편 브루엔 선교사의 유고 정리 형식으로 쓴 책.
마펫 원장이 이 책을 동산의료원에 보내 주었고, 의료선교박물관에 보관 중이었는데, 대구남산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책을 남산교회에 주었고, 남산교회 교인이며, 계명대학교 문화정보학과 교수 김중순 박사가 번역함.

 

대구선교부에서 42년간 복음을 전한 H.M. 브루엔(1874-1959) 선교사.

그는 1874년 미국 뉴저지주 서미트(Summit)에 위치한 중앙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던 제임스 브루엔(James DeHart Bruen)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2세 때 어머니 마가렛(Margaret White Munro Bruen)의 별세로, 할머니인 안나(Anna Miller Bruen)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조부(James McWhorter Bruen) 또한 목사였으며, 조모(祖母)는 당시 저명한 성경학자요, 교회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선교 악단(Mission band)을 조직하여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부해리 선교사의 가정은 할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헨리 M. 브루엔(Henry Munro Bruen 부루언 한국명: 傅海利)18741026일 미국 뉴저지(Summit)에서 출생하여, 1892년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5월 프린스턴(Princeton)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그의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공부를 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선교사로 출국하기에 앞서 마르다(Martha Scott)와 약혼한 뒤 1899929일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하여 그해(1899) 1026일 제임스 E. 아담스(James E. Adams) 목사와 우드브릿지 존슨(Woodbridge Johnson) 선교사에 이어 대구선교부에 세 번째 선교사로 부임했다.

25세 미혼 총각의 몸으로 대구에 도착한 브루엔은 그 후 한국식 이름을 부해리(傅海利)로 정하였는데, 이는 그의 애칭인 해리 브루엔(Harry Bruen)에 발음이 가장 가까운 말을 딴 것이었다.

2년 후인 1901년 그의 약혼자이며 동창생인 마르다 브루엔(Martha Scott Bruen, 1875~1930 부마태(傅馬太)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대구에 돌아왔다. 그들은 슬하에 안나(Anna, 1905.2.1)와 해리에트(Harriette, 1910.10.2.) 두 딸을 두었다.

대구는 189951일 한국에서는 4번째로 선교기지인 스테이션(Station)이 공식 개설된 곳으로, 이미 1897년부터 선교기지로서 실질적인 활동을 해 왔었다. 대구는 조선시대부터 행정, 경제, 교통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기지가 개설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중심지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대구 선교부에서 안의와, 장인차 등과 함께 대구경북 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브루엔(Bruen) 선교사 부부는 경상북도 서부지역에서 42년간 선교 활동을 하면서, 설립된 교회는 1900년 영천군 대창면에 조곡교회(助谷敎會)를 세운 이후, 1901년 김천군 송천교회와 선산군 죽원교회 설립을 비롯해 경북 서북부 지방(김천, 선산, 칠곡 등)과 대구 등 55개 교회에 이르고 있다.

-김천 21교회  (松川, 月明, 柳城, 館基, 大陽, 福田, 黃金町, 光基, 夏江, 中甘, 東部 松谷, 鳳川, 校洞, 上部, 大新, 鳳山, 黃溪洞, 新谷, 新岩, 인의동)

-선산 10교회 (竹院, 月湖, 槐坪, 桃山, 上毛洞, 五桂洞, 靑山, 路上, 習禮, 栢子洞)

-달성 7교회 (下洞, 大明, 聖堂洞, 新川, 午山, 新塘里, 本里 )

-칠곡 5교회 (眞坪, 倭館, 崇烏, 黃鶴, 福星洞)

-상주 5교회 (沙山, 西町, 五里院, 五廣, 화산)

-성주 3교회 (大興-1901, 京山, 明浦)

-고령 3교회 (安林, 軒門, 三大)

-군위 1교회 (鳳凰洞)로 잠정 집계되었다.

  이 가운데 성주 경산교회(현 성주읍교회 전신)의 교회 건축시 건축헌금을 드린 명단이(부해리, 임성봉 등) 우리 가문에 남아 있다. (대구에 도착한 첫날부터 나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자 개짓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신방을 구경하듯 문구멍을 뚫고 침실을 훔쳐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에는 대구읍성안의 기온이 살인적인 더위이며 각종 냄새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나는 신경과민 증세가 생겼고 이런저런 핑계로 대구를 떠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1896년 성주읍교회를 세우고 임성봉 영수와 여러 성도들과 함께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스토리텔링 중에서)

-부해리 선교사가 미국선교부에 선교보고용으로 촬영한 1940년대 모습에서

임성봉 장로, 이망랑 권사, 임영희 장로, 임종룡 장로, 임도수 선교사, 임천석 장로, 김종분(?) 권사로 추정되는 가문 사람들

 

1904년에 의료 선교사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 어을빈(魚乙彬)과 빈턴(C.C. Vinton, 1856~1936 빈돈(賓頓) 등과 함께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21월 경상노회(慶尙老會)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231일부터~14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는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후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193010월 마르다(Martha) 부인과 사별한 4년 뒤 193494일 부인의 친구이며, 동산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간호 선교사 클라라(Clara M. Hedberg)와 재혼했다.

송천교회의 창립 이후 1938년까지 당회장을 지낸 부해리 선교사는 일제의 진주만 침공 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으로 194161767세의 나이로 대구를 떠나 같은 해 920일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갔다.

1944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기까지 대구에서 그의 선교 사역의 대부분인 43년간을 헌신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Santa Cruz)에서 17년간 거주하다가 195932684세로 별세했다.

부해리 목사는 '마크(Mark)'라는 사냥개를 키웠는데, 전도 나갈 때는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 우리나라의 토종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냥개를 처음 본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자신이 훈련시킨 개를 옆에 자랑삼아 앉혀두곤 모인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며 전도를 했다.

또한 부해리 선교사는 대구 동산병원 초창기 때에 존슨(장인차) 의사의 병원 수술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부해리 선교사는 존슨이 시키는 대로 환자를 마취하는 일을 했는데, 이는 존슨의 말을 알아듣는 간호사 또는 보조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대구 선교기지에서는 나환자 구제사업을 위해 1917 ~18년 사이에 동산병원 인근에 나환자 요양소 부지를 확보하고 병동과 진료실, 예배당 건물을 지었다. 요양원 교회는 1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해리 선교사는 이곳으로 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나환자들이 찬양하며, 설교를 듣는 모습을 통해 기쁨을 느끼며 감동을 느낀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그들은(나환자들) 가끔 그들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질병이 아니었더라면 구주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얼굴이 주님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부해리 선교사는 평소 매우 성품이 소탈하고 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과 그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믿음과 사랑, 인내의 선교사였다.

부해리 목사와 가깝게 생활했던 사람들은 그를 '천사(天使)' 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지역 교인들과 두터운 정을 나누고 가신 분이다. 이러한 모습은 계성학교 교장을 지낸 헨더슨의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해리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번 만난 사람의 얼굴은 좀처럼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두 사람(부해리와 현거선)이 같이 시골길을 가고 있었는데 마침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이때 부해리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한 사람을 불렀다. “김영태씨! 안녕하십니까?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잠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 다음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갔다. 부해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은 내가 17년만에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부해리는 한국어로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예배 시간에 성경 봉독 순서가 되면, 그는 강대상 앞에 나가 봉독할 성경 구절을 먼저 말하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찾게 한다.(당시 한국 교인들은 성경, 찬송을 늘 지니고 다녔다). 교인들이 성경 구절을 다 찾고 나면 부해리는 성경을 보지도 않고 그 구절을 모두 외워서 낭독하였다.

부해리는 또한 교인들을 만나면 그때,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성경 구절을 들려주는 습관이 있었다. (헨더슨 -현거선)는 부해리와 여러 해 동안 대구 선교기지에서 같이 일하고 지냈지만 한번도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고, 결코 위선적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깊은 경건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모든 선교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전도를 다닐 때는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자전거가 매우 귀하여 이를 '안경말' 또는 '비거(飛車)'라고 불렀다. 워낙 자전거가 신기하여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놀라운 기계들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기술 있는 사람이 됩니다.”

 

클라라 브루엔(Clara Hedberg Bruen 한국이름: 하복음(河福音)

1923년 간호사 의료선교사로 대구에 온다. 하복음은 동산 기독병원의 간호 선교사로 1923년부터 간호과장으로 있으면서 192510월 의무과장 손인식과 병원 사무장 김덕수의 협조로 1925년 동산 기독병원 구내에서 계명대 간호대학의 전신인 간호부 양성소를 설립했다. 그녀는 1941년까지 그곳의 간호부 양성소 소장으로 있었으며, 1941년까지 모두 18년 동안을 18년간 동산병원 간호책임자로 근무했다.

1930년 브루엔 선교사 부인 마르다 브루엔(Martha Scott Bruen)이 죽자, 1934년 브루엔 선교사와 결혼하여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슬하에 브루엔 주니어(Henry Munro Bruen Junior)를 낳았다.

 

 

믿음의 가문_230413_1712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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