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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선교 사역/태국 촌부리 선교센터

촌부리와 김정웅 선교 History 158

by 임도마 2025. 3. 27.

<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158) >

목회자의 산실 엄다교회

목포제일교회, 새목포제일교회와 엄다교회도 선한 목자팀의 한국연수시에 늘 들리는 교회들이다. 시골 교회와 또한 많은 목회자를 길러 낸 산실의 모델을 보여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선친께서 신학교를 졸업하신 후 아무 교회가 없었던 함평군 엄다면 송로리의 다 허물어져 가는 잿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당시 찾아온 흉년에 어차피 아무 일도 못하니, 거기서 2km 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머리에 돌을 이고와서 사람이 끄는 구루마(리어카)에 옮기면, 고 김종대 집사님과 남자들이 밀고와 석조 65cm 두께의 이층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 마을의 이름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베다니 마을로 짓고, 야간 학교를 통해 수많은 목회자를 길러낸 목회자의 산실이 되었다. 시골 교회였지만 목회 6년 후 첫 안식년을 광주에서 보내시고, 다시 재부임해서 18년을 목회하신 곳이다.

개척 당시의 교인들 중에 일부가 아직 살아계셔서, 가서 볼 때마다 친정집에 온 것 같은 곳이다.

그 후 목포제일교회로 부임해 가셔서, 24년을 목회하고 후에 사위가 된 담임 목사와 함께 은퇴 목회자로 다시 새목포제일교회를 함께 개척하셨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정부가 이상촌을 뽑을 때 지정이 되어, 기와집 12채를 새로 지어서 이사 온 공동체 마을을 이루셨다.

당시 1950년대에 이미 자가용이 들어 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고, 덴마크의 이상형 농촌의 꿈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님과도 공유하셨다.

그래서 세 교회들을 순회하며 이런 역사를 설명하여 사랑도 나누고, 배우기도 한다.

또 교회 앞 밭을 막벨라 묘지로 평토장을 해 두었는데, 그것도 보여 주며 필자 자신에게는 선교지에 나가있기에 평소에 성묘도 못하는데, 그때 만이라도 잠깐 둘러 조부모와 부모님 묘지를 보며 성묘를 겸하는 시간을 가진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교인이신 고 전경자 권사님이 참외밭에 직접 가서 맛있는 참외를 따 와, 선한 목자팀이 차에 타고 떠나려고 하는 데도 머리에 이고 와서 대접하는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필자와는 육신적으로 사촌 누님이 되시는데, 요즈음은 가서 뵙지 못해 안타깝다.

흑백 사진의 2대 목사가 고 조몽룡 목사님이고, 그의 장남 조주석 목사님이 초등학생일 때, 필자가 신학생으로 여름 성경학교를 인도할 때 사진도 있고, 그의 동창인 김칠백 장로는 현재 촌부리 센터에 실버 선교사로 와서 여러모로 돕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통계로서 목회자와 사모로 헌신한 사람이 68가정이 될 정도였다.

ETI 영어교육 사역을 하는 정광성 선교사도 조 목사님이 처음 목회할 때, 당신 집에 사시면서 자칭 자기의 Baby seater 노릇을 해 주신 분이라고 한다.

고 조광채 목사님과 윤정중 목사님도 엄다교회 출신으로 죽마고우들이다. 울산대 교수 배영일 장로님도 그 당시 함께 지냈던 분이다.

신학교에 갔던 젊은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장로, 집사들도 헌신해 목회자의 길로 나가는 이런 특이한 교회를 방문하며, 태국에도 그런 교회들을 세우려는 꿈을 안고 돌아온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제일 적은 함평군, 제일 적은 엄다면이라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우나 영적으로 풍요하고, 현재 한국 농촌교회들이 유년주일학교나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들이 많으나, 엄다교회는 모든 부서의 구색을 다 갖추고 있다.

엄다교회에서는 장수하는 분들도 많아서 60, 70대는 젊은 사람 취급을 받으며, 어른들을 잘 모시는 모델도 되고 있다.

현재 강 목사님과 사모님이 선한목자 세미나의 강사로 오시고, 시골 반찬들도 가져오셔서 잘 먹고, 우리 선한목자 일행이 한국 연수 방문시 맛있는 다과와 점심도 잘 대접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