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_선교한국 웹진 원고
선교행정연구소/선교 자료 2016-06-27 01:29:29
선교사역 지금 여기서 시작입니다
선교한국을 결산할 때, 여러 모양으로 선교에 헌신한 청년들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선교사로 나간 사람들의 수는 헌신자의 수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선교한국대회에서 선교에 헌신한 그 헌신이 값싼 헌신으로 매도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의 헌신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헌신을 받아줄만한 그릇이 한국 선교계에 준비되어있지 못한 것일까? 선교한국대회의 열매인 선교헌신자들의 그 고귀한 헌신이 한 여름 밤의 꿈이 되지 않도록 기도한다. 7-8년 후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선교사의 삶을 막연히 기다리는 한, 선교사적 삶에 대한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우리는 이 대회가 끝나는 날, 바로 거기서 우리의 새로운 삶 즉, 선교사적 삶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만이 헌신자들의 헌신을 정말 값진 것으로 그리고 유효한 것으로 드러내줄 것이라고 믿는다. 선교사역은 오늘 여기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선교는 ‘정식’ 선교사가 되어서 성대한 파송식을 마치고 선교지로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환상을 버리라. 우리가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안목은 전세계의 모든 열방에 미치며 그 백성의 안목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면, 지금 여기서 그것에 합당한 선교사적 삶을 시작해야 한다. 내가 좀 더 완숙한 경지에 이른 후라고 말하지 말자. 내가 좀 더 훈련을 받은 후라고도 말하지 말자. 우리가 넓은 의미의 선교사로, 선교동원가로서 살 수 있는 선교사적 삶(missionary life)은 지금 여기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양태로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니, 설령 그 가능성들이 닫혀있다 하여도 우리는 그 환경을 창의적 접근으로써 열어가야 할 것이다.
창의적 접근지역은 저 멀리 소위 ‘선교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당신이 서 있는 현장이 바로 ‘선교지’이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선교사역이다. 오늘 이 땅에서 시작한 당신의 선교사역은 내일 ‘정식’ 선교사가 되어 타문화권 선교지에서의 당신의 선교사역을 보여주는 밑그림이 될 것이다. 오늘을 내일의 사역의 볼모로 잡고 있는 한, 내일의 선교사역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깔때기라 하여 선교사로 파송되지 못하고 적체되던 많은 선교헌신자들이 나가서 사역하고 살아 갈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획일화된 하나의 구멍(선교사로 파송되는 길) 만을 두지 않고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어야만 한다.
오늘날의 신세대는 이전세대들처럼 획일화된 전형적인 헌신을 낯설어하는 세대이다. 이를테면, 중보기도 동원가의 삶이라든지, 외국인 근로자 사역, 혹은 지역교회의 선교위원,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선교를, 그리고 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친다든지, 선교의식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동원하는 학생선교단체의 간사로서든지, 신학교를 나와서 선교적 목회를 감당하는 목회자가 된다든지, 자신의 직업을 통하여 국내에서 선교적 삶을 살든지 다양한 선교적 삶의 유형을 가르치고,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구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이런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시스템적으로 이 개념을 실행한다는 합의는 도출되지 못하였다. 깔때기를 파이프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떻게 깔때기의 입구와 함께 출구의 지름을 크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오히려 깔때기의 모델을 버리고, 江의 모델로 바꾸어 이해하고 그것에 적합한 시스템을 갖추어 간다면, 우리의 선교동원은 풍요로운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그림 2).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선교사역들, 그리고 선교사적 삶을 다음의 그림과 함께 생각해 보자.
<그림 2>는 사실상, 청년학생그룹만이 아닌 온 교회를 동원하는 전체의 그림을 담고 있다. 물론 단기든 장기든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이 선교동원에 있어서 열매와 같으므로 가장 큰 입구로 선교한국대회와 같은 대회를 통해 청년학생그룹을 동원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들이 선교사로 파송받아 나가는 것을 큰 출구로 두었다.
마치 상류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며 강을 이루어 가는데, 첫 단계는 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기부여와 헌신의 단계이다.
본류에 해당하는 선교한국대회를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헌신을 하거나, 지류에 해당하는 교회의 선교부흥회나 선교사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선교에 헌신한다. 모두 본류에서 만난다.큰 줄기에 다른 줄기들이 또 합류되어 거센 물살을 이루어가는 것과 같다. 다른 물줄기들은 지역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선교헌신예배나 선교부흥회와 같은 집회에서 선교를 알고 선교에 이모저모 헌신하게 되는 경우가 있겠고, 지역교회가 파송했거나 후원하는 선교사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선교에 깊이 몰두하고 헌신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며, 지역교회나 어떤 신앙 모임에서 선교에 관한 성경공부 혹은 지역교회의 정상적인 선교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헌신하게 되는 경우가 물론 있을 수 있다. 이외에도, 학생선교단체의 (선교)수련회나 선교동원가의 역할을 캠퍼스에서 잘 수행하는 간사의 도전을 받고서 헌신할 수 있다. 그리고 선교한국과 같은 연합체에서 주관하는 단기선교학교에서 선교에 헌신할 수 있다. 이외에도 거센 본류를 이루어내기 위해 만들어질 수 있는 지류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모두 개별적으로 다른 강을 이루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이제까지의 선교동원이라고 한다면, 이제 이 江의 그림은 모든 노력들, 그것이 지역교회에서 행하여졌든지, 학생선교단체에서 행하여졌든지, 그 노력들이 하나의 본류에서 합쳐짐으로써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선교한국운동이라는 연합선교운동을 통해서 선교에 헌신하게 된 사람들을 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선교한국운동 외에 얼마든지 교회를 통해서, 학생선교단체를 통해서 또는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헌신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서 그들이 자연스레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을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준비 단계다.
동기부여와 헌신의 과정으로부터 사역과 결실의 과정에 이르기까지에는 준비과정이 놓여있다. 사실, 이 준비과정에서 오염물들이나 침식현상으로 말미암아 강의 넓이가 좁아짐으로써 강물이 범람하여 엄청난 수자원이 유실되어 버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오염물이나 침식현상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많은 선교동원의 문제점들이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상류에서 쏟아져 밀려내려오는 강물을 범람시키지 아니하고 하류로 다 내려 보내기 위해서는 선교동원가들 그리고 각 단체들과 교단, 교회들의 연합과 협력은 필수불가결이다. 여기에 우리가 시스템 구축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다양한 형태의 선교헌신자들은 큰 물줄기를 끝까지 타고 내려가 단기 혹은 장기 선교사로 파송이 될 것이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교적 삶의 가능성의 지류에로 흘러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지류도 결국에는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바다로 들어가기 전까지 온 땅을 기름지게 적셔 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만이 유일한 바른 길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다양하게 지류로 빠져나가는 헌신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선교적으로 동원할 수 있고, 학생선교단체에 속한 청년학생들을 선교헌신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이 여기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지역교회 선교동원가, 지역교회 선교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지역교회 주일학교 교사로서 이미 전문파송단체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마련된 선교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린 아이들부터 선교적으로 훈련시키는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이외에도 캠퍼스의 선교동원가로서, 중보기도네트워커로서, 혹은 다가온 땅끝이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비록 이들은 국내에서 살아가며 사역을 이모저모로 감당하지만, 이들을 통해서 또 다시 ‘다양한 형태로’ 선교에 헌신하게 되는 사람들은 배가 내지는 승법번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은 선교에 관심이 있거나 헌신한 모든 청년학생들을 다 끌어다가 내보내려고 함으로써 한국교회에 선교의 씨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선교적 헌신을 가르침으로써 배가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교회 선교동원가
캠퍼스 선교동원가
지역교회 선교위원
중보기도 네트워커
지역교회 주일학교 교사
외국인 근로자 사역자
선교지로 나가지는 않았으나 세계를 품고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 이와 같은 많은 무명의 헌신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해외선교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선교적 삶을 획일화하여 선교지로 나간 사람만을 가지고 선교동원을 평가하는 것은 잣대의 오류이다.
선교대회 참석자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선교적 변화 역시 우리의 잣대로는 파악 불가능한 것이다. 분명히 그들 가운데는 시간을 두고 헌신하게 된 부류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선교동원의 정의는 기독청년학생들을 선교지까지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온 교회의 잠재력을 세계복음화의 성취를 위하여 선교에 동력화하는 것이 바로 선교동원이다. 우리가 선교동원의 결과를 잣대로 재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재고해야 한다. 오늘날, 수량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정신에 기초하여 선교동원을 평가하려고 하는 시도는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하였던 경우(역대상 21장)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수량 평가에는 하나님께서 비밀히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평가가 쉽지 않다. 영적 평가의 기준 제시가 쉬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의 모호함이 수량적 평가의 실용적 당위성을 정당화 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
선교한국은 연합운동체이기 이전에 우리의 꿈이다. 선교한국은 꿈을 가진 사람들, 그 꿈을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선교한국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주실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선교한국운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시작되었다.
선교동원 실패의 문제는 전략이나 시스템의 문제이기에 앞서, 바로 오늘의 자칭 타칭 선교동원가들 자신의 문제이다. 선교동원가들이 모인 자리는 스스럼없이 꿈을 나누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자리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 단체를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 양자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들이 단체만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인양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진정한 선교동원가들이 있는 한, 선교한국은 꿈으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선교동원 전략과 새로운 동원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앞서, 그것을 실행하여야 하는 우리 동원가들 자신의 정직한 내적 성찰과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한다.
시스템은 모든 요소가 논리적으로 잘 연결 배치되었을 때, 시너지를 발생시킨다.
이런 점에서 학생선교단체, 전문파송단체 그리고 교회가 각각 움직이는 한, 우리는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다. 모두가 백화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원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지향해야 하는 것은 백화점이 아니라 전문점이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백화점을 꿈꾸고 그것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여기서 파생되는 중복투자와 자원의 누수를 가슴아파할 만큼 전체를 보지 못하는 근시안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지역교회들이 선교단체에 대하여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현상이다. 선교단체는 몇 안되는 좋은 인력을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가고, 교회는 선교단체 보기를 소위 ‘양도둑’으로 보고, 학생선교단체는 전문파송단체에 양질의 인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전문파송단체는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해왔다.
선교동원은 우리 단체나 우리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자원을 내어주는 것이다.
선교한국 운동과 함께 한국교회에 특별히 청년학생들 사이에 점화되었던 기도합주회는 선교동원과 관련하여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주제다.
바로 ‘중보기도와 영적 각성(부흥)’이다. 그러나 현재 선교동원가로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이 기도합주회에 세계복음화의 승부를 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관심있는 사역자들이 자투리 시간을 내어서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조직적이지는 않지만, 중보기도와 영적 부흥 그리고 세계복음화의 성취라는 패턴을 이해하고 무릎을 꿇는 신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중보기도와 영적 부흥 그리고 이어지는 세계복음화의 성취라는 패턴에 대한 공통된 이해나 기대 혹은 믿음이 동원가들 자신들에게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강요하거나 한 번 가르침을 받아서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배우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선교동원에 있어서 깔때기를 파이프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 부흥이라는 상황이다.
윗튼 대학의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셨던 부흥의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36년을 시작으로 하여 1943년, 1950년, 1970년과 1995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부흥이 일어났었다. 그 때마다 윗튼 전체 학생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한 전임사역자로 자신들의 삶을 주님께 드린 학생들의 비율은 놀라울 정도이다. 1936년의 부흥을 경험하였던 학생들을 보면, 1934학번이 전학생의 38%, 35학번 36%, 36학번 33%, 37학번 31%가 장기헌신자로 자신들의 삶을 드렸다. 물론 이후에 부흥이 올 때마다 이런 현상은 반복되었다. 1943년에 학생이었던 사람들 중 30%이상이 전임사역자가 되었고, 1950년에는 전학생의 39%가 전임사역자로 헌신하였다. 윗튼 대학의 부흥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행하실 수 있으신 놀라운 일을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패러다임 쉬프트
환경이 변화하는데, 이전의 패러다임으로는 안 된다. 작은 떡을 가지고 서로 많이 먹으려고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의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함께 노력하여 큰 떡을 만들어서 배부르게 나누어 먹는 ‘포지티브-섬 게임’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각 선교단체의 지도자들로부터 실무 간사들 그리고 교회, 교단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패러다임의 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제로-섬 게임’에 머물러 있는 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까지 잡아먹게 될 것이고, 더 이상의 황금알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선교헌신자들을 서로가 차지하려고 경쟁함으로써 결국 한국교회에 선교헌신자의 씨를 말리기 보다는, 한국교회에 벌떼와 같은 선교헌신자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동의 시스템적 노력을 기울여서 그 열매를 풍성하게 나누어 가지기를 지향해야 한다. 지만원 박사는 이것을 쉽게 이렇게 설명한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신발 가게가 하나씩 있었다. 하루에 평균 열 켤레씩 팔렸다. 분산돼 있던 신발 가게를 어느 한 곳에 나란히 모았더니 하루에 백 켤레씩 팔렸다.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군데 모았을 뿐인데, 열 배의 효과가 난 것이다.” 함께 큰 떡을 만들어 둘 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선교단체와 교회, 학생선교단체와 전문파송단체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동원전략의 3요소 영성, 시스템, 총체성.
영성은 한국교회의 선교동원이라는 대의와 시대적 필요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서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정신을 말하며, 연합운동체는 조직적 연합이 아닌 영적 연합체가 되어야한다. 기본전제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선교연합조직을 위해서 모일 때, 제도화되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속해서 1세대의 꿈을 유지,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힌 동원가들이 모인 자리가 필요하다. 이것은 언제나 선교한국과 신속한 세계복음화라는 꿈과 대의를 위해 자기와 자기 단체를 희생할 수 있는 영성이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 요한의 선교적 마음 자세가 전형적 선교단체들과 개교회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선교연합체가 벌써 정치적 안배를 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 연합운동에 기대할 수 있는 바는 없을 것이다.
시스템은 한국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기관들이 연합하고 함께 움직임으로써 시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고, 교회, 교단 지도자들, 그리고 학생선교단체와 전문파송단체를 망라하여 선교동원가로 헌신한 대표급 지도자들과 간사나 교회의 청년대학부 지도자들로 구성되는 일선 지도자들의 선교동원가 협의체가 필요하다.
여러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여 동원사역에 뛰어들 때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선교단체들이 개별적으로 시행하는 것보다 훨씬 크며, 그들 각 단체들이 투자하는 것도 중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적이다. 이것은 앞의 신발가게의 예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슬람권선교협의회나 전문인선교협의회와 같은 구조들이 생겨나고 연합적 활동을 하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인 것이다. 학생선교단체들의 지도자들과 간사들의 선교의식은 필수적인데, 여러 가지 점에서 만족할 만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학생선교단체 간사들의 선교의식 결핍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 전 IVF 선교담당 간사였던 김종호 간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간사들은 나쁜 것을 가르쳐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가르치지 않아서 범죄하게 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선교한국 대회와 같은 집회에서 선교 헌신을 한 학생이 정상적으로 자신의 선교의 열정을 유지하고 선교적으로 성숙하여 갈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는 간사가 심히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적 차원의 지도가 오직 선교담당 간사의 일로 여겨진다면, 그곳에는 소망이 없다. 종종 교회가 선교 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선교에 헌신한 청년 학생들이 교회에서 제대로 선교적 양육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여지곤 하는데, 이것은 학생선교단체가 조금 더 나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사실상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 속에서 선교의 꿈과 꿈꾸는 학생들은 사장되어버리는 것이다. 학생선교단체 간사들 그리고 교회의 청년대학부 지도자들이 선교적으로 성숙하고 바른 열정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전문파송단체의 역할과 지역교회와의 관계에서 전문파송단체는 양질의 선교인력을 독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연합과 협력을 깨뜨리는 요소가 된다. 선교로 동원된 모든 인력이 다 전문파송단체로 모여지는 것이 아니다. 전임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은 물론 전문파송단체들로 연결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외의 다양한 선교사역의 헌신자들은 각 교회로, 각 학생선교단체로 흩어져 그들의 섬김을 다하는 가운데, 선교동원가로서 살아가도록 격려받아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헌신이다. 전문파송단체는 교회를 섬기는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전문파송단체는 일할만 하면 일군을 빼앗아가는 양도둑이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기름지고 살진 양들을 많이 길러낼 수 있도록 가능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선교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전문파송단체들의 몫이다. 당장 쓸 수 있는 선교사 후보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기에, 전문파송단체들이 이 필요를 깊이 느끼지 못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이 늦어질수록, 선교동원은 감속될 것이다.
선교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온 교회를 선교에 동원시키는 가장 든든한 동원전략이다.
어린 아이들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저들이 성경으로부터 선교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 형편에서 한국교회가 선교에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심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단체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연합으로 할 수 있는 대단히 의미있는 사역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선교교육 프로그램에 특별한 은사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선교적 성숙을 위한 선교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팀이 구성되어야 한다.
신학교보다 더 좋은 선교동원의 장은 없다. 신학생들이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선교지로 나가서 사역을 하거나 혹, 목사로서 본국에서 목회를 하게 될 때, 선교 중심적인 목회를 한다고 할 때에도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현재, 신학교에서 충분한 선교동원이 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물을 때, 그리 긍정적인 대답을 찾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선교는 언제나 신학교의 주변과목에 머물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점에서 각 신학교는 선교지의 오랜 경험과 더불어 학위를 마친 학문적으로 준비가 되어있는 한국 선교사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선교사야말로 최고의 선교동원가들인 것이다. 전임교수로서 들어와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기꺼이 이 사역을 국내에서 감당하고자 자신의 선교지를 희생하는 선교사들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전임이 아니더라도, 가르칠 수 있는 선교사 인력 뱅크를 구축하여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 인력의 pooling system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단 신학교들이교단의 신학적 색깔을 고려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스템이 될 수 있다. 신학교는 1년 과정의 전문인 선교사를 위한 신학과정을 열어야 한다. 많은 선교헌신자들이 고민하는 것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심각한 부담 중 하나는 ‘신학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경우는 M.A.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M.Div. 과정뿐이다. 이것은 목사가 되는 과정이다. 전문인 선교사들의 경우,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배워야하는 전 과목을 다 배우기 위해 3년을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선교사로 헌신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교지로 연결하는데 장애가 되는 한 요소이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신학과목들로 편성된 1년 과정의 신학과정은 전문인 선교사 시대를 열기 위해 필수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토대이다. 교단신학교나 초교파신학교들이 과감하게 문을 개방하여야 한다. 여기서 역시 교수의 부족 현상이 문제가 된다면, 될 수 있다. 이것도 선교사 인력의 pooling system을 통해서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총체성은 온 교회를 선교동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선교동원의 대상은 청년학생 계층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학생 계층에 선교동원노력이 집중됨으로써 한국교회 선교의 심한 불균형 현상을 초래하였고 나아가서는 선교의 인프라스트럭처를 형성하는데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다. 선교사를 동원하는데 선교동원 노력의 대부분이 사용되었고, 선교를 가르치는 열심이 부족하였다. 선교동원 대상은 온 교회이다. ‘잠재적인 갈 자들’인 교회 안의 청소년들과 유초등생들에 대해서는 동원이 불필요한가? 보낼 자들이 대다수일 장년, 노년층에 대한 선교동원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 이들이 있는 지역은 거의 선교의 불모지가 아닌가? 갈만한 자들은 다 나갔으니, 누가 선교동원가의 삶을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알을 낳겠는가? 신반포교회 홍문수 목사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이제는 선교단체 중심의 선교동원운동이 개교회와 체계적인 인계 관계를 형성하며 개교회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들이 선교 의식으로 충만해져서 선교동원 운동에 앞장서고, 일반 성도들 모두가 선교 자원으로 동원되도록 유도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밑바닥까지 훑어 가는 동원운동이 되지 않으면 특정 계층 중심의 선교에 머물게 되고 어느 순간에 가서는 벽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단기선교학교의 확산
단기선교학교는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선교한국에서 주관, 협조하고 있는 단기선교한교는 서울과 대구, 광주, 제주 등지에서 지금까지 모두 약 2,500여명을 훈련시켜왔다. 이외에도 개별적으로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들이 시행해왔고, 전문파송단체들이나 학생선교단체들이 해왔다. 물론 모두가 하는 노력들이 다 선교의 헌신자들을 만들어내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비슷한 과목들을 다루며, 강사들의 면면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국내에서 선교 강의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인력층이 대단히 얇을 뿐 아니라,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선교 강사들의 pooling system을 만들어 연합적으로 그리고 보다 많은 지역으로 확대하여 단기선교학교를 실시한다면, 중복투자와 자원의 누수 현상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장 우리 단체에 선교사로 들어오는 사람을 잡지 못하지 않느냐고 반문을 할 전문파송단체가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장기적으로, 함께 연합하여 보다 큰 떡을 만들어 배부르게 먹고 열 두 광주리나 남길 수도 있다는 점을 보고 당장의 배고픔을 참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기선교학교에 참여한 사람이 선교사로 우리 선교단체에 지원을 했는가는 당장 물어야 할 사안이 아니다. 참고로, 금세기 초 학생자원자운동(SVM)이 한창일 때, 미국의 경우를 보면, 1914년 700개 대학에서 4만 명이 선교학교(Mission Class)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들이 모두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선교적 삶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온 교회를 선교로 동원하는 일을 감당함으로써 적어도 1920년대초까지 SVM이 활발히 확장되는데 밑거름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SVM의 실패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그들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선교 인턴쉽(실습) 과정의 개설
선교한국과 같은 기관이 연합운동체로서 선교 헌신자 자원을 관리하는 일까지 하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공공연하게 표출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선교한국은 하나의 선교단체가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두려워서 우리가 마땅히 연합적으로 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으므로 제도적으로 안전장치가 필요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헌신자들이 제대로 선교단체를 선정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도 전에 선교단체에 흡수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선교에 준비가 되고 안목이 생겼으며, 여러 차례 선교단체들을 접촉해 본 이후에 배우자인 선교단체를 선정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적어도 선교에 헌신한 개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므로 단기선교학교와 같은 과정을 통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헌신할 경우, 약 1년 정도의 인턴쉽 과정에 들어옴으로써 잠재적인 선교사 혹은 잠재적인 선교동원가로서 준비가 되고, 구체적으로 그의 전문영역과 특장이 파악되어 필요한 영역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인턴쉽 과정은 선교한국과 같은 연합체가 시행하되, 역시 연합적으로 구성된 훈련팀이 공동의 노력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턴쉽 과정이야말로 선교 헌신자 자원을 pooling system으로 운영하는 방안이다. 그럼으로써 전문선교단체는 보다 안전하게 선교사 후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screening의 한 두 단계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본부의 사역자(간사)나 교회의 선교담당 교역자와 같이 다양한 계층도 이런 공인된 선교 인턴쉽 과정을 통해서 발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교한국과 같은 연합운동체가 중립적인 자리매김을 해나갈 때 가능한 일이다.
기도합주회의 시스템 구축
기도합주회는 부흥(영적 각성)과 세계복음화를 최우선의 기도제목으로 삼고 기도하는 네트웍이다. 그러나 이것이 네트웍이라기보다는 기도회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현재의 어느 정도 한계이다. 첫째로 그 원인은 진정한 전임 기도네트워커(기도동원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임사역자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도사역과 기도동원이 선교동원의 우선 순위에서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기도합주회의 사역을 위해 전임으로 사역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기도동원과 기도사역은 사실 그렇게 한가하게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선교동원가 중 기도동원에 부담을 가진 전임 기도동원가들이 속히 세워져야 한다.
선교정보 유통구조의 개선
기도합주회가 부흥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데, 여기에 우리가 첨가시켜야 할 것은 선교지의 구체적 상황들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하도록 기도합주회 본래의 흐름과 정신을 유지하면서 기도제목들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정보 유통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중보기도자들에게 선교지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기도편지에 의존하다보니, 적어도 3-4 개월이 걸려서 정보를 받게 된다. 물론 기도정보지들이 있지만, 이것들 역시 모호한 것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모든 전문파송단체의 본부는 선교지와 국내 교회를 효과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구체적 기도제목,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갱신되고, 지난 주에 기도한 것이 이번 주에 어떻게 응답되었는지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유통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선교단체 본부들과의 연결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 내에 각 도시와 각 지역교회 마다, 그리고 수적으로 1만명, 그리고 5만명, 10만명의 중보기도자들을 순차적으로 일으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도를 날마다 보내는 것이 선교비를 달마다 보내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전문선교단체들의 인식변화와 구조개선에 따라서 가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열쇠는 오히려 선교동원 시스템에 있다기 보다는 그것을 구상하고 만들어내야하며, 실행해야할 사람들, 바로 오늘 모인 우리들에게 주어져있다. 여기 우리가 더 이상 선교동원가연하지 아니하고, 얼마나 진정한 꿈을 가진 선교동원가가 될 수 있는가에 선교 한국의 미래는 달려있다고 보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보라! 선교 한국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우리는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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