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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선교 사역/태국 촌부리 선교센터

촌부리와 김정웅 선교 History 154

by 임도마 2025. 3. 26.

<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154) >

케냐 대회와 성지순례

19938월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세계한인선교사회 총회로 모이면서, 국내외 저명 강사들을 다 초청해서 큰 도전도 받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좋은 식당과 사파리도 일박을 하며 체험했다.

신홍식 선교사님이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된 후, 곧 바로 고 방지일 목사님(당시 83세 청년)과 이집트를 방문하고, 고 이연호 선교사 묘지에 참배하며 예배를 드리고, 이준교 선교사님의 안내도 받았다.

이집트 카이로 한국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으면서, 정승회 선교사님이 앞으로는 단기 선교팀들이 오면 선교지 음식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맛있는 한식도 대접해야 하겠구나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당시 현존하던 선교사의 산 역사이신 방지일 목사님과 함께 성지순례를 같이 하며 배울 수 있었던 시간들은 큰 축복이었다.

방 목사님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대회를 하고, 모세보다 더 연세가 많으신 83세의 나이에 정장을 입으시고, 나귀도 안 타시고 새벽에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서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셨다.

사실은 당시 담당 의사는 시내산 등반을 말렸으나, 새벽 1시에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는 험산을 도보로 일사각오를 가지시고 오르신 것이다. 필자는 더 젊어서 이극범 선교사와 앞서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성지순례를 하며 눈물의 기념교회와 승천하신 기념교회 등의 방문은 감동적이었고, 성지순례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생략한다.

 

고 이연호 선교사의 순교시 기록한 김신숙 선교사님의 글을 아래에 참고로 옮기며 지금까지도 혼자서 선교지를 지키는 것이 너무 귀하다.

 

"사막에 장미꽃이“

김신숙 선교사 (도서출판 횃불)

"그날 밤 모든 손님들이 다녀가신 후, 부모님께서 어려움을 당한 나와 함께 잠을 청하시려고 애를 쓰시는데, 하루 종일 긴장하고 정신차려 일 처리 하려던 나의 마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북받쳐 오르는 슬픔과 오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픈 가슴을 누르고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이 어느 정도라는 것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몸부림치는 슬픔과 고통인데 말로서 무어라 설명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 밤은 악몽의 밤이였다. 절망의 밤이였다. 암담하고 캄캄한 밤이였다. 하나님의 사람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하면서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은 너무나 힘들고 무거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히실 때 만큼의 고통은 아니겠지만,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큰 아픔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날 밤에 오열하는 비통의 통곡은 땅을 무너지게 하였다.

어린 세 딸들은 아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면서도 엄마가 우니까 옆에 둘러 앉아서 "엄마! 아빠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 엄마"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묻고 있었다. 큰 딸 은혜는 아빠의 죽음이 무엇인지 실제로 알고 느끼면서 매우 슬프게 울며 말이 없었다. 둘째 지혜와, 셋째 에스더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라서 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더욱 가슴이 미어져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세 딸을 부둥켜 안고 정신없이 울었다.

719일 이집트에서 고 이연호 목사님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장례식을 위해서 서울서 교회 대표, 가족 대표 두 사람이 준비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충현교회에서 김창인 목사님께서 가시려고 했으나, 지방에서 집회를 마치고 오신 후라 건강이 허락지 아니하여 선교부의 대표로 한경일 장로님께서 가시도록 결정을 하였고, 가족 대표로는 친정 아버지께서 가시기로 했다.

나는 내가 가기를 너무나 너무나 원했으나 수술 후라 건강이 허락지 않고, 더욱이 심장이 약한 터라, 두 사람 장례식을 치르게 하려느냐고 모든 가족들이 반대를 하여 할 수 없이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그냥 서울에 남아서 장례식을 하고 돌아올 아버지와 장로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나 답답하고 기나긴 시간들이며 미칠 것만 같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지와 한경일 장로님께서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너무 긴장하고 초조한 나머지 장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설사를 하고 말았다. 그때의 나의 심정은 불안과 초조속에서 갈팡질팡하였다. 그 짧은 시간이 나에게 몇 달이 되는 듯..

그가 사망한 소식은 카이로 총영사관(1996 년부터 대사관으로 승격)에 연락이 되었고 대사관에서 급히 사고 현장과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하고, 카이로 마디 지역에 있는 군인 병원에 운구를 옮겨 놓았다.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카이로 남쪽(외각지)"마디"라는 지역에 있는 '마디 군인 병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민간 병원이 아니다. 정부에 관련된 사람들이나, 관의 직위가 높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란의 팔레비 왕도 몸이 아플 때 입원해서 치료하다가 사망을 하기도 한 곳이다. 공관에서 특별히 수습을 하여 유해를 몇 일간 안장을 했고, 부모님과 교회 대표 한경일 장로님이 이집트에 도착하신 후, 친정 아버지의 손으로 사위의 입관식을 하고, 1979719일 마디 미국교회(Maadi Community Church; 카이로 한인 교회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한인교회 교인들, 공로명 이집트대사님을 비롯하여 공관 직원들과 온 교민들, 그리고 현지인 엘리아스 마카르 목사님, 사무엘 유세후 교수 및 현지인 교회 교인들, 외국인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꼭 있어야 할 아내와 자식들이 없는 슬픈 장례식이었다.

반면에 서울에서는 유가족들이 있으므로 충현교회에서 725일 저녁 7시에 유가족들과 친지들, 충현교회 교인들, 친구들을 모시고 추도예배를 드렸다. 소복을 입고 남편의 유해도 없는 가운데 애절한 마음으로 추도예배를 드리는데, 남편의 뒤를 이어 선교를 계속하겠다는 나에게 김창인 목사님께서 선교 임명장을 주셨다. 나의 선교사 임명장은 남편의 죽음과 바꾸는 의미 심장한 선교사 임명장이었다. 교회 1,2 층을 가득 채운 추모객들 앞에서 나는 남편의 생명을 대신하는 피맺힌 선교사 임명장을 받았다. 다른 선교사들이 선교사로 떠날 때 받는 선교사 임명장과는 의미가 달랐다. 김창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 이연호 목사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서 애굽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선교사로 일을 했지만 피의 댓가로 얻은 선교사 임명장은 나를 더욱 엄숙하게 하고 엄중하여 막중한 회교권 사역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지...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 그리고 힘과 능력이 갑절이나 필요함을 느꼈다. 충현기도원으로 올라갔다. 삼일간 기도원에서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는 기도를 나도 하였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주신 세 군데의 성경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는 못 할 것이 없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나는 슬픔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현지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로 바쁘게 다녀야만 했다. 또 카이로 한인교회를 담임할 목사님을 모시는 문제 등, 충현교회 선교부와 의논할 일들이 많았다. 시댁에는 맏며느리로서 부모님을 위로도 해야했고, 얼마의 위로금도 드리고 돌아왔다.

8월 중순 나는 어린 세 딸을 데리고 이집트 현지로 돌아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나왔다. 김포공항에는 김창인 목사님을 비롯하여 부목사님들 전도사님들, 그리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그외 환송객 등 공항 한구석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떠나는 인사를 하는데, 그 중 카이로 공관에서 근무하시던 임갑준 참사관님 내외분 앞에 이르렀을 때 입을 악물고 참고 있던 울음이 그만 터져 버리고 말았다. 임 참사관 내외분은 카이로에서 19774월 부활절을 기하여 한인 교회를 시작하였을 때 창립 교인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남편 생각이 나서 사모님을 부등켜 안고 울컥 치받쳐오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19778, 남편이 중동 선교사로 떠난 지 1년만에 어린 세 딸을 데리고 떠날 때는, 보고 싶고 그리던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하여 벅차고 들뜬 마음으로 재회의 기쁨을 안고 김포공항에서 출국을 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출국하는 나는 캄캄하고 암담한 마음으로 남편의 무덤만이 기다리고 있는 눈물이 서린 슬픔의 나라로 떠나는 것이었다. 남편은 한국인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중동 회교권 선교지를 개척하면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이루어 놓은 지 3 년만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힘들게 개척하여 이루어 놓은 선교를 이렇게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앞 길이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었다. 오직 믿음, 믿음으로만 승리를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비행기에 올라 장시간 나르는 동안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눈물이 계속 내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이와 함께 언어 공부하던 일, 신학교에서 일하던 일, 한인교회 시작할 때 '마디' 지역과 '헬리아 폴리스' 지역에서 예배 드리던 일, 심방하던 일, 아이들과 놀던 일, 유학생들을 초대하여 식사하던 일, 유적지를 연구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탐방하던 일, 수도원 방문하여 수도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콥틱교회를 연구하던 일 등, 주마등같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마구 흘러내렸다.

또 갑자기 무서움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워낙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과 슬픔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서움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하였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부모나 부부, 형제들이 죽으면 정을 떼기 위해 무서움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러는 동안 카이로 공항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