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3) >
장남을 선교사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전남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교역자를 구할 수 없어서, 연세 많은 선교사를 초청해 산남교회를 개척한 청년이 자신도 독자이면서, 첫 이삭을 목사로, 선교사로 바쳤습니다.
그가 후에 신학을 하고 51인 신앙동지회로 복음을 지켜왔던 전도사가, 함평군의 무교회 면인 엄다면에 군청년연합회가 개척한 교회에 가서, 황무지에 베다니 마을이란 성경적 이름을 짖고, 장남을 목사로 바쳐 대를 이어 목회하도록 기도하다가, 결국 선교사로 바치게 되었다.
평소 느리고, 여유만만하셨던 김일남 목사님의 장남 필자 김정웅 선교사도 "됐어"와 느린게 약점입니다.
"신학교 시절 저의 아버님은 교수가 질문한 것을 궁리 궁리 하다가, 수업을 마치고 교수가 문을 나가려고 하면 그때야 대답을 하곤 했더래요. ㅎㅎ"
그러면서도 김준곤 목사님과는 신학교 기숙사 룸메이트로, 조동진 목사님과는 한 교실에서 동기로 졸업을 하셨지요.
제가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릴 때, 고 김순일 선교사께서 왜 그렇게 선교가 안 되는 태국에 가느냐 하실 때, “저는 느리고 기다릴 줄 아니 걱정 없습니다”하고 오늘까지 태국에서 느긋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
아파도 됐어“, 없어도 ”됐어“, 안되도 ”됐어“, 범사에 “됐어”이니, 항상 ‘마이뻰라이(괜찮다)’고 하는 태국에 적임자인가 봐요.
‘빨리, 빨리’하는 한국에는 약점이지만, 범사에 느리고 여유 만만한 태국에는 아직도 쓸모가 있나 봅니다.ㅎㅎ
고 양일준 장로님이 자기 아들 독자가 선교사로 간다고 하니, “목사님이 좀 말려 달라”고 할 때, “저는 8남매 자녀가 있지만 선교사로 외국과 타지에 다 떠나가 있습니다”라고 답하셨는데, 후에 고 양일준 장로님과 최월순 권사님이 촌부리에 선교사로 두 번이나 오셔서 수고하셨고, 목사인 두 사위가 다 선교사로 헌신하고, 그때 중 3때 선교사로 헌신한 아들은 의사로 열심히 돈을 벌어 선교사로 헌신한 3가정의 좋은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장자를 바친 그 믿음 따라, 저도 장자 바울이 태국 선교사로 와서 오랫동안 선교하고 있고, 동생 김칠백 장로도 미국 베다니교회와 미 농무성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태국 선교사로 와서 태국어를 배우는 중입니다.
선교는 각자가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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