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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선교 사역/태국 촌부리 선교센터

촌부리와 김정웅 선교 History 5

by 임도마 2025. 4. 12.

<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5) >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선교사의 사명 완수는 소명감에 달려 있고, 소명감은 부르신 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본다.

저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란 말씀에 확신을 주시니, 비록 무일푼이고, 아무런 대책도, 후원교회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선교의 길은 내 뜻에 의해 가는 길이 아니고, 주 예수께서 사명을 맡겨 파송하시는 일이니, 책임도 그분이 다 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계속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 하니, 초임 선교사의 제일 큰 난제 세 가지가 바로 해결되는 것이다.

1. 선교사의 여러가지 부족함과 능력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국선교의 어려움도 다 아시고 저의 부족함과 약함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부르셨으니, 순종해 나가기만 하면 필요한 능력도 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낙심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2. 지금도 코로나 19로 상황이 더 어려워졌지만, 1976년도는 아직 해외선교에 눈도 뜨지 못하고 교회들의 재정도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후원교회나 후원 회원들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큰 교회가 안 하면 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 부자나 어른들이 안하면 중고생이나 어린이를 통해서라도 하실 것이라 믿었다.

 

3. 생사와 질병의 문제이다.

사명자가 사명을 다 완수 하기 전에는 죽지 않고, 참새를 돌보시는 주께서 생사와 병고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태국에서 그 해 봄에 미군이 철수하고, 도미노 현상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까지 공산화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더 빨리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시급성만 더 가지게 되었다.

 

그런 믿음과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모든 준비가 쉽지는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선교비 모금이 잘 안되니 "선교비 모금에 실패한 선교사"라는 별칭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 중에 고흥읍교회 학생회 수양회 강사로 초청을 받아가서 학생들에게 매월 300, 500원과 1,000원씩을 작정하게 했는데, 그 당시 월 1,000원씩 후원한 선교회원이 후에 태국 치앙마이 선교사로 온 신옥련 선교사가 있다.

광주서광교회 김창래 목사님은 교인들 중 76명이 십시일반으로 선교비를 작정해 기도와 함께 후원해 주었다. 그가 격려한 말은 "호남의 교회들만이라도 다 협력하면, 호남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 후원을 못하겠느냐?"였다.

서울남부교회 조광채 목사님은 선친과 함께 엄다교회의 첫 시무장로로 봉사한 조수만 장로의 셋째 아들인데, 봉천동 소재인 이주민들을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몇 차례 강제 철거까지 당한 가난한 교인들이지만, ”우리가 다 선교지에 가야 할 사람들이지만, 가지는 못하더라도 한달에 하루씩이라도 그 달중에 제일 수입이 좋은 날의 수익금을 선교비로 바치자했는데, 첫해에 월 100불씩 선교비를 후원했는데, 성경 말씀의 약속대로 첫해에 130배가 되는 예배당 옆의 한 주택을 구입하는 축복도 받았다.

너무 바쁘게 선교지에 갈 준비를 하는 것에 쫓겨, 태국에서 온 참란 쌩차이목사님이 동서선교개발원에 와 있는데도, 그에게 태국어를 배울 시간도 없이 분주한 시간들을 보냈다.

선임이 되는 신홍식 선교사님은 안식년 준비차 이미 서울에 오셨고, 중간 한 달을 돕겠다는 고 한명수 목사님도 돌아오셔서, 급하게 선교지에 가야 하는데 모금이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