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5) >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선교사의 사명 완수는 소명감에 달려 있고, 소명감은 부르신 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본다.
저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란 말씀에 확신을 주시니, 비록 무일푼이고, 아무런 대책도, 후원교회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선교의 길은 내 뜻에 의해 가는 길이 아니고, 주 예수께서 사명을 맡겨 파송하시는 일이니, 책임도 그분이 다 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계속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 하니, 초임 선교사의 제일 큰 난제 세 가지가 바로 해결되는 것이다.
1. 선교사의 여러가지 부족함과 능력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국선교의 어려움도 다 아시고 저의 부족함과 약함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부르셨으니, 순종해 나가기만 하면 필요한 능력도 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낙심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2. 지금도 코로나 19로 상황이 더 어려워졌지만, 1976년도는 아직 해외선교에 눈도 뜨지 못하고 교회들의 재정도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후원교회나 후원 회원들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큰 교회가 안 하면 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 부자나 어른들이 안하면 중고생이나 어린이를 통해서라도 하실 것이라 믿었다.
3. 생사와 질병의 문제이다.
사명자가 사명을 다 완수 하기 전에는 죽지 않고, 참새를 돌보시는 주께서 생사와 병고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태국에서 그 해 봄에 미군이 철수하고, 도미노 현상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까지 공산화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더 빨리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시급성만 더 가지게 되었다.
그런 믿음과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모든 준비가 쉽지는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선교비 모금이 잘 안되니 "선교비 모금에 실패한 선교사"라는 별칭까지 받게 되었다.
그런 중에 고흥읍교회 학생회 수양회 강사로 초청을 받아가서 학생들에게 매월 300원, 500원과 1,000원씩을 작정하게 했는데, 그 당시 월 1,000원씩 후원한 선교회원이 후에 태국 치앙마이 선교사로 온 신옥련 선교사가 있다.
광주서광교회 김창래 목사님은 교인들 중 76명이 십시일반으로 선교비를 작정해 기도와 함께 후원해 주었다. 그가 격려한 말은 "호남의 교회들만이라도 다 협력하면, 호남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 후원을 못하겠느냐?"였다.
서울남부교회 조광채 목사님은 선친과 함께 엄다교회의 첫 시무장로로 봉사한 조수만 장로의 셋째 아들인데, 봉천동 소재인 이주민들을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몇 차례 강제 철거까지 당한 가난한 교인들이지만, ”우리가 다 선교지에 가야 할 사람들이지만, 가지는 못하더라도 한달에 하루씩이라도 그 달중에 제일 수입이 좋은 날의 수익금을 선교비로 바치자“했는데, 첫해에 월 100불씩 선교비를 후원했는데, 성경 말씀의 약속대로 첫해에 130배가 되는 예배당 옆의 한 주택을 구입하는 축복도 받았다.
너무 바쁘게 선교지에 갈 준비를 하는 것에 쫓겨, 태국에서 온 ‘참란 쌩차이’ 목사님이 동서선교개발원에 와 있는데도, 그에게 태국어를 배울 시간도 없이 분주한 시간들을 보냈다.
선임이 되는 신홍식 선교사님은 안식년 준비차 이미 서울에 오셨고, 중간 한 달을 돕겠다는 고 한명수 목사님도 돌아오셔서, 급하게 선교지에 가야 하는데 모금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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