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89) >
주태한인선교사회
해방 후 또 한번 맞이한 국난 6,25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모국 교회에서는 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1956년 최찬영 선교사 가정과 김순일 선교사 가정이 파송 받아 태국에 오신 지 32년이 지난 1988년 방콕에서 태국 한인선교사회를 창립하였는데, 그 당시 최고참 신홍식 선교사님이 미국에 출타중이셨지만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임원회가 구성되었다.
선교사들의 회복과 영적 충전을 위해 대선배이신 최찬영 선교사님을 주강사로 모시고 제1회 선교사 수련회를 가졌다.
다음 해, 제2대 회장이 된 필자는 ‘찬양의 밤’ 행사를 주최하고, 태국에 온지 겨우 1년이 지난 정석천 선교사를 지휘자로 삼고, 태국어 찬양들을 포함한 여러 찬양들을 열심히 연습한 후, 큰 교회 찬양대들과 신학교 및 미션스쿨의 합창단과 독창자들을 초청해서 연합으로 ‘왓타나’ 교회당에서 ‘찬양의 밤‘을 열어 태국 교회에 찬양의 밤 물결을 일으켰다. 또한 찬양을 통해 모든 선교사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다.
그해 연말에 성탄축하 잔치를 ’수리웡‘에 있는 몬트리올 호텔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그날따라 방콕의 교통체증이 극도로 심하게 일어나 한바탕 난리가 났던 기억이 있다. 주태한인선교사회 회장인 필자가 행사 모임 시간 3시간 반 전에 집에서 출발했는대도 행사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었고, 총무 김성곤 선교사는 1시간 반 늦었고, 이영기 회계가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해서 모임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그날 행사장에서 가까운데 살고 있는 분들과 고속도로를 이용한 소수의 사람들만 제 시간에 도착해서 늦게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도착하는 순서대로 저녁을 나누는 해프닝이 벌어겼다.
또 연말 수련회가 치앙마이에서 열려 급히 가야 하는데, 단기팀과 저녁 식사를 하고 ’라차다피섹‘ 사거리에서 픽업차의 뒷편에서 내리기로 한 아들 다니엘이 미리 내리다가 뒷통수를 다쳐 의식 불명이 되었다.
’밤룽랏‘ 병원에 가니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 조금만 더 낮은 부분이 다쳤으면 평생 불구가 될 뻔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8시간 이상 코마가 와서 깨어난 후에 ’내가 왜 여기에 누웠느냐‘는 질문을 해서 대답해 주어도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은혜받고, 더 구체적인 선교의 제자훈련을 받으러 왔다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후유증 없이 건강을 회복하였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태국 단기 선교를 한 후, 미국 카버넌트 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를 하였고, 지금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교수로 간접 선교를 하고 있다.
주태국 한인선교사회는 처음부터 태국에 부임해 온 순서대로 회장을 하니 체계적으로 질서가 잘 잡혔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회칙을 바꿔 회장이 더 젊어지기는 했으나, 너무 젊어서 한국의 강사 초청과 재정 후원을 받는 일에 어려움이 많이 생겨 회장직을 사양하는 경우가 많은 선교회가 되어 좀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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