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150) >
태국 선교 30주년 감사와 축하!
태국 선교를 출발할 때부터,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의금을 내는 심정으로 선교사를 후원했던 개척한지 1년된 남서울교회와, 모두가 지상명령에 따라 선교사로 가야 하지만, 가지 못하는 대신에 한 달에 하루만이라도 가장 수입이 잘 된 날의 수입을 선교헌금으로 바치며 선교에 동참했던 서울 남부교회가 함께 필자의 태국 선교 30주년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김정웅이순교 선교사 태국 선교 30주년을 축하하는 잔치는, 태국에서 김중식 GP-Thai 회장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지피 태국 선교회가 주최하여 2006년 Grand Hotel에서 모였다.
중요한 계기 때마다 촌부리 센터에 오셔서 축하해 주신 홍정길 목사님이 주축이 되어 태국 선교 30주년을 축하하며, 태국 교계와 태국의 한인선교사들과 성도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태국 CCT의 부총회장 ‘위랏’ 목사는 치앙마이에서 총회가 모이는 중에도 와서 개회 기도를 해 주시고, 홍정길 목사의 당시 교회 입장을 설명한 설교와, 주최자 이철 목사님의 환영 인사와 필자의 아들 김바울 선교사 가정을 대를 이어 파송하고 함께 격려해 주기도 하셨다.
태국 선교 시작부터 같이해 주신 고 남준우 장로님 30주년 축하 영상 인터뷰에 응해준 각 교단의 총회장들의 축사들과, 은혜의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촌부리 천사들의 합창과, 카렌족 성도들의 축하송이 일품이었다.
모든 영상과 선물 준비와 사진들 준비를 위해 수고해 주신 신바람 선교 김 치겸 선교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처음 1976년 미군이 태국을 철수했던 해에, 태국 선교사로 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를 위험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한 달을 다녀도 4식구의 기본 생활비 300불도 작정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반포에 개척한지 1년 된 남서울교회에 가서 선교 보고를 하고 모금을 작정하러 갔는데, 나중에 안 사실은 그 바로 전 주일에 7명의 제직들이 막 얘배처를 비가 새는 M동 지하동에서 H동 3층으로 이사해서 집세도 다 내기에 어려운 개척교회라 선교는 못하는 것으로 결정이 이미 난 후였는데, 본인은 그것도 모르고 선교후원을 받으러 간 것이다.
‘제가 이제 가서 얼마나 선교하겠습니다. 저는 죽더라도 저의 자녀손이 대를 이어 선교하기를 바란다’고 선교 간증을 할 때, 그 말에 힌트를 얻어서 홍정길 목사님이 ‘이 김 선교사가 죽으러 간다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초상집에 빈손으로는 갈 수 없으니, 2년간만이라도 조의금 조로 헌금을 작정하자’고 해서 14만원이 작정 되었다. 뒤에 홍정길 목사님이 자기가 아직 작정을 안 했다며 만원을 보태서 월 15만원이 작정금이 되었다.
당시 환율이 483대 1이었다. 나중에 당시 담임 목사의 월 사례비가 얼마였냐고 질문하니 웃으면서 ‘월 7만원이었다‘고 했다. 그 중 만원을 선교비로 바쳐 담임목사는 월 생활비가 6만원이 되고, 1년된 개척교회가 선교비로 담임 목사 생활비의 250%가 되는 월15만원을 작정하여, 2년이 아니라 지금까지 46년째 후원하고 있다.
얼마 전 교회에서는 명목은 은퇴선교사 반열로 옮겼지만, 선교비는 똑같이 월 50만원씩 후원해 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당시 기도하시며, 100년 후의 태국을!, 200년 후의 중국을!, 300년 후의 인도 복음화!를 꿈꾸면서 기도하셨고, 당대에 선교의 열매를 못 보더라도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셨다.
교인들과 1989년 11월 촌부리 센터 준공식에 참석해서 설교를 해 주셨다.
1979년 처음으로 세계일주 여권을 받아 일정의 마지막에 태국에 오셔서, 방콕한인연합교회 교인들에게 특강 하시는 고 하용조 목사님과 옆에서 기뻐하는 CCC 나사렛 형제들과 함께 했다.
당시 미국을 샅샅이 다 돌아 보기 위해 9일간 그레이 하운드 야간 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순회했다고 하여, 태국에서 북부지역 ’람빵‘ 집회에 가기 위해 항공권까지 다 사두고 약속을 했는데, 건강 때문에 취소한 일이 있었다.
태국 선교 30주년을 함께 축하해 주신 고 조광채 목사님은 서울남부교회 (현재 이루는교회) 담임 목사로, 저의 선친이 엄다교회를 개척하실 때 첫 장로로 동역하신 고 조수만 장로님의 막내 아들인데, 아들 시대에 와서도 계속해 조광채 목사님과 필자의 동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처음 선교를 시작할 때 찾아간 서울남부교회는 수재민들이 피난 온 봉천동의 어려운 교회였으나 조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우리 모두는 지상명령에 따라 다 선교사로 가야 되지만, 갈 형편이 안 되어 못 나갑니다. 그러니 한 달에 하루 만이라도 선교사로 갔다는 생각을 품고, 제일 수입이 좋은 하루 수입을 선교비로 드리자"고 하며 교인들에게 도전했는데, 성경 말씀대로 그 해 교회를 130배로 축복하셔서 교회 옆에 있는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막 10:30)
현재의 현대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에, 그 지역 중심에 7층 예배당을 지어서 선교와 영성 훈련의 중심지로 사용하고 있다.
선교사로 첫 출국과, 센터 땅을 구입한 후 첫 촌부리선교대회, 선한목자 세미나 20주년 100회 때와, 매번 선한 목자팀의 한국 연수팀의 한국 방문시는 물론, 촌부리 천사들의 합창단의 첫 한국 공연시 공항에서 환영하는 것부터 모든 사역을 함께 시작하였다.
촌부리 천사들의 합창단이 갑자기 3주반 일정의 미국 여행에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못 가게 되었을 때에도, 한국의 거점으로서 65회의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수고해 주셨다.
선교사들의 무덤으로 소문난 태국에서 지난 30년과, 현재 46년차까지 중단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이런 헌신적인 후원자들과 함께해 주신 여러 동역자님들의 덕분이며, 저는 앞에서 감사하며 열심을 다 하려고 애쓴 것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태국 선교 30주년 감사예배 후 남서울교회 선교 보고 영상
https://m.facebook.com/groups/chonburikimjw/permalink/258283454845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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