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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선교 사역/태국 촌부리 선교센터

촌부리와 김정웅 선교 History 16

by 임도마 2025. 4. 15.

< 돌아보는 태국선교의 삶 (16) >

협력하는 일곱 선교사 가정!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일곱 나라에 흩어진 일곱 선교사 가정이 처음으로 KMF(Korean Missionary Fellowship)란 이름을 정하고, 흩어진 그 나라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정보를 나누고, 격려하자하여 7개국에 흩어진 7선교사들이 마음을 모았다.

그때에는 정보나 국제 전화도 자유롭지 못했던 1977년대로 일본의 백병수 선교사, 필리핀의 김활영 선교사,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정글의 이은무 선교사, 홍콩의 홍종만 선교사, 방글라데시 정성균 선교사, 이집트로 간 이연호 선교사와 태국의 필자 김정웅 선교사가 모여 서로의 희노애락애오욕을 나누고, 격려 하기 위해 마음과 뜻을 모았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족들이 녹음기로 소식을 전하고, 우편으로 받은 그날 밤에 바로 녹음하여 다음 날 일찍 보내어 7가정이 돌아가며 듣기로 했는데, 이집트로 가면 돌아올 줄 몰랐다.

그래서 너무 늦어서 두 달 만에나 한 바퀴를 돌아오니, 나중에는 양쪽으로 돌아 서로 소식을 나누기로 했다.

요즈음 젊은 선교사들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통신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제가 원본을 하나라도 보관하고자 복사를 하고 보내 드렸는데, 지금 그 복사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서재 어디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녹음기가 저희 가정에 왔을 때가 마침 어머니 주일이라 가족이 함께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란 어머님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부르고, 태국 소식을 전체 국가별로 합해 7분간 하고, 이은무 선교사님이 중간에 노래도 집어넣었고, 자기 순서가 되면, 이전에 것은 지우고,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방법을 사용했었다.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이연호 선교사가 이집트에서 교통사고로, 정성균 선교사가 방글라데시에서 선교하다가 파키스탄으로 옮겨가 선교하는중 B형 간염으로, 홍콩의 홍종만 선교사가 후두암으로 세 분이 짧은 기간에 돌아가시게 되어 순교의 제물들이 되어짐으로 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마침 저는 백병수 선교사와는 신학교 동기이고, 다른 세 분은 합동 교단으로, 정성균 선교사와 장양백 선교사는 대전대학 선후배로, 그리고 이은무 선교사는 국제선교협력기구(KIM)에서 같은 해 7월과 9월에 각각 파송받아서 모두가 잘 아는 관계가 되었다.

홍종만 선교사는 영어로 사역을 했지만, 중국어를 알아야 되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정성균 선교사는 한국에서 오신 후원교회 목사님이 세례를 베풀고, 그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 결국 선교지를 바꿔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다.

이연호 선교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인도네시야, 싱가폴을 거쳐 태국까지 왔으나, 중동을 위한 헌신이 그로 하여금 아무 대책도 없이 불속에 뛰어 들어가게 하여 결국 그곳에서 순교의 재물이 되었고, 아내 김신숙 선교사가 대를 이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김활영 선교사는 할 일은 많은 데 일군이 적어 "주여 한국 선교사 100가정을 필리핀에 보내 주소서"했는데 지금은 몇 천명의 가정이 필리핀 복음화를 위해 뛰고 있다.

이 모임은 후에 선교대회도 가졌고, 모임 멤버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오늘날의 KWMF의 전신이 되기도 했다.

제가 선교지 사역 4년만에 한국에 들어가 중간 보고를 하러 가는 길에, 필리핀에 하루 들러서 선교사님들과 교제하고, 그 뒤로도 모여서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한국 선교를 시니어 선교사들과 함께 염려하며 기도했다.

우리 모두는 초기의 개척자로 외로움과 고생을 낙으로 알고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서로 만나고 싶고, 지금도 만나면 위로하고 새힘을 얻게 된다.

지금도 가능하면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는 몇몇 선교사들이 카톡방 등을 통해 서로의 즐거움과 아픔을 흉허물없이 주고받으며, 협력하는 동역자들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고 정성균, 임평수, 장양백, 김정웅은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4, 5회와 6회 동문들이었습니다.